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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어두운 벽에 낸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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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어두운 벽에 낸 구멍

입력
2002.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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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받아 든 주인은 저으기 놀랐다. 얼마 전부터 부쩍 깨끗해진 것이다. 그릇에 먼지도 묻어 있지 않았고, 반찬에 지푸라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던가. 그러고 보니 그 놈에게 주방 일을 맡긴 뒤부터였다. 주방에 가 보았다. 전에 없이 열심히 쓸고 닦고 있었다. 부뚜막도 깨끗했고, 바닥도 정돈돼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주방 담벽에 주먹만한 구멍이 하나 새로 뚫려 있었다. 그 곳으로 햇살이 들어와 부뚜막을 지나 부엌바닥까지 기다랗게 햇빛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햇빛기둥은 공중에 떠도는 조그만 먼지나 티끌까지 낱낱이 비춰 먼지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일꾼들은 그 먼지기둥을, 햇빛기둥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 청소를 하고 있었다. 주인은 무릎을 쳤다.주방장은 봉건 일본의 군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주인은 분열된 일본에서 통일의 기치를 들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주방장은 이후 주인의 신발 담당관으로 승진했다. 그는 한겨울 새벽 주인이 말을 타러 나올 때 밤새 껴안고 자서 따뜻해진 구두를 꺼내줘 거듭 주인을 놀라게 했다.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부엌에 선명하게 드러난 햇빛기둥 하나가 주변을 쉼 없이 청소하게 만들었다. 깨끗한 음식과 밥상을 내 놓았다. 많은 식구의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부엌에 어찌 먼지나 티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침침한 곳에 위치한 부엌이란 으레 그런 곳이었다. 먼지나 지푸라기는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먼지나 티끌이 많이 있음을 느끼지 못했고, 닦고 쓸어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갖지 못했다. 한 줄기 햇빛이 먼지에 산란(散亂)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게 되고, 청소의 필요성을 느껴 정화에 참여하게 만드는 일, 언론은 바로 그런 것이다. 존재 이유인 동시에 권리와 의무의 범위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세월을 거쳐 어두침침한 부엌의 담벽에 많은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아니라 아예 담벽이 없어져 버린 상황이 됐다. 모든 먼지와 티끌이 햇살에 적나라하게 산란되고 있다. 닦아내지 말아야 할 것도 있겠지만 치워 없애야 할 것도 많다. 먼지다 아니다, 치우자 말자 논란도 많다. 정화할 것을 가려내고 선택하는 것은 일꾼들의 몫이다. 주인은 깨끗한 밥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집에 새를 두 마리 키우고 있다. 앵무새과의 올리브라는 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가 모이를 주며 말했다. "이렇게 갇혀 살게 하다니 불쌍하다. 풀어줘 버릴까." 함께 있던 고등학교 2학년인 언니가 말했다. "얘들은 태어날 때부터 새장 속에 있어서 숲이나 하늘을 몰라. 아마 지금 새장 밖으로 나가면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먹이를 구하지도 못해 얼마 가지 않아 죽어버릴 거야. 얘들에게는 좁은 새장이 오히려 편하고 안전한 곳이야." 동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새장 속에서 태어나 제공되는 물과 모이만 먹으며 날개도 잊고, 바깥 세상도 모르면서 아주 편한 듯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병진 여론독자부장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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