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루 볕이 어딘데…이 달부터 정부 추곡수매가 시작됐지만 수매 현장은 예년 이맘때에 비해 한산하다. 벼 꽃이 피고 이삭이 오르는 7,8월에 비가 잦아 평년보다 7∼10일 벼가 늦게 익는 탓이다. 덜 여문 조곡을 내놓으면 수분이 많고 품질 등급도 강등당하기 일쑤. 안중면에 사는 한 농민은 "물벼를 줄기째 놓고 보면 알곡이 그럭저럭 붙어 있지만 털어서 왕겨를 벗겨 보면 쭉정이가 많다"며 "3,000평 털었는데 나락은 400평 분이나 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수매가를 동결(1등급 40㎏·6만440원)하는 대신 특등급을 신설해 2,000원씩 더 쳐주기로 했지만 날씨 탓에 그 혜택을 보는 논도 별로 많을 것 같지 않다는 푸념이다. 안중 RPC 관계자는 "이맘 때는 하루 볕에도 소출에 큰 차이가 난다"며 "지금 벼를 내는 농민들은 남들보다 일찍 모를 낸 경우도 있지만 열에 일곱여덟은 돈이 급한 경우"라고 귀띔했다.
인근 송탄RPC도 마찬가지였다. RPC 관계자는 "직접적인 수해피해는 덜 입었지만 벼가 팰 때 비가 집중되는 바람에 소출이 대폭 준 데다, 예년보다 수분 함량이 많은 편이어서 농민들의 불평이 만만찮다"고 말했다.
▶가을걷이에 바쁜 들녘
미곡종합처리장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오성 협덕 안중 청북 포승 등 인근 마을 들녘은 수확의 가쁜 기계소리로 부산했다.
구형 콤바인을 모느라 구슬땀을 흘린 청북면 옥길리 이장 김학근(44)씨는 "그나마 올해 '쌀금(쌀값)'이 괜찮아서 다행"이라며 "일찍 수확하는 대신 밥맛이 떨어지는 조생종 벼를 심었던 농가들이 지난 해 죽을 쑨 뒤 올해는 덜 심은 데다 비 때문에 햅쌀 수확이 늦어져 일시적으로 물량이 달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품앗이 나온 같은 마을 조모(61)씨가 손사레를 치며 "정부서 (대선을 겨냥해) 농민들한테 점수 따려고 비축미를 안 풀고 있기 덕택"이라며 비아냥대자 나락 포대를 져 나르던 서너 명도 '아무렴'을 연발했다.
가을 비라도 와서 나락에 싹이라도 트게 되면 수확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또 비가 바쁜 일손을 붙들었다. 인근 논에서 콤바인을 몰던 이성호(64)씨는 "올해는 징글징글하게 비도 많더니, 아직도 내릴 게 남았나"하며 시동을 끈다. "벼에 물기가 있으면 콤바인도 잘 안 나가고, 나락 거름망이 막혀 옆으로 새기 일쑤"라고 말했다. 그래서 수확작업은 이슬이 걷히는 오전 10시 이후에나 시작해 밤 이슬이 내리기 전인 오후 8시께 마무리한다. 그는 "날씨가 추워져 서리라도 오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적어진다"며 "그렇다고 하루 5만∼6만원씩 줘가며 품을 사기도 그렇고, 또 일손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아직도 정부를 믿어요?"
늦은 점심을 먹고 논두렁에 모여 앉은 농민들은 농정 비판에 열을 올렸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농촌지도소에서 대진쌀, 대안쌀(저급 다수확품종) 심으라고 안 하던가. 그런데 이제 쌀이 남아도니 품질로 승부를 걸라니, 기가 막혀서…" 그 말을 받아 한 농민은 "아, 그때는 노는 논 일구면 농약 값에다 종자까지 얻어 쓰며 애국자 대접 받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멀쩡한 논을 놀리라(휴경보상제)고 안합디까. 아제(아저씨)는 정부 말 듣다가 이 꼴 났으면서 아직도 믿습니까"라고 핀잔을 줬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종한(36)씨도 "수해피해도 제대로 보상 못해주면서 소득보전(소득보전직불제)을 해준다니 소가 웃을 일"이라며 거들었다.
이장 김씨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농협 빚 내서 땅 늘리고 기계 사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투자를 안 한다"며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농사를 부업 삼아 하기로 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닌다"고 전했다.
▶"올 단풍놀이는 어쩌노."
평택 들녘은 10월 말이면 대부분 까까머리로 변한다. 이맘때면 단체 '단풍놀이'계획에 마을마다 술렁이기 일쑤지만 올해는 좀 더 두고 보자는 분위기다. 쌀 개방이다, 정부수매 폐지다 해서 분위기가 하루가 다르게 썰렁해지고 있고 11월 서울 농민대회도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청북면 옥길리 노인정도 연례행사였던 가을 단풍놀이를 내년 봄으로 연기했다. 7살 아래 할머니와 단 둘이서 1만평 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 마을 김인식(78) 노인은 '올해 소출도 시원찮으니 건너뛰자'는 노인정 여론에 밀린 게 못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농부 일년 중 맘 먹고 노는 날이 며칠이나 된다고 단풍놀이를 없애냐. 올 겨울 못 넘기고 일 치를 노인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평택·송탄=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소작료·기계값 등 빼면 800평 일년품삯 110만원"/서울대 농대출신 송태경씨
여우비가 간간히 내리던 7일 오후, 평택의 신참 농군 송태경(32·사진)씨는 수렁논에서 누워버린 벼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800평 도지논인데 땅이 질어 툭 하면 벼가 쓰러집니다. 그나마 일부는 아예 수확을 포기해야 할 판입니다."
소출은 한 마지기(150평)에 3가마꼴로 쳐서 약 14가마. 하지만 도짓세(소작료·마지기당 1가마)를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10가마분(168만원·시세 기준)이다. 또 농약·비료값과 기계·인건비, 운반료 등을 빼면 실제 송씨가 이 논에서 버는 것은 7가마 남짓에 불과하다. 그는 "110만원이 800평 논일 일년 품삯"이라고 말했다.
농활로 인연을 맺어 1997년 대학(서울대 농학과) 졸업과 함께 평택에 뿌리를 내린 송씨는 이듬해 정부가 선정하는 '농업경영인'에 뽑히면서 융자 5,000만원에 자기 돈 1,300만원을 보태 논 10마지기를 샀다. 융자 받아 애호박 하우스농사도 해봤지만 시세가 폭락해 빚만 늘었다. 그 사이 두 딸(3살, 5살)도 태어났다. 송씨는 안되겠다 싶어 지난해 3년 할부로 신형 콤바인(3,300만원)을 샀다. 한 마지기 기계 품삯 20만∼25만원. 송씨의 올 가을 콤바인 목표 작업량은 80마지기다. 23만원씩 쳐서 1,840만원 수입이지만 기계 할부금(1,300만원) 내고, 기름 값(200만원), 보조원 품삯(150만∼200만원) 주면 남는 것도 없다.
송씨는 "기계 품을 팔겠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 일거리가 많지 않지만 더 큰 고민은 역시 '쌀시장 개방'"이라고 말했다. 정부 정책은 송씨 같은 농사꾼은 사라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믿고 고생살이를 자처한 아내지만 최근에는 슬그머니 농사 포기를 종용하기도 한다. 남 못잖게 일했지만 그가 6년 동안 진 빚은 1억 3,000만원. 이제 떠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빚 줘가며 농사 지으라더니 이제 그만두라구요? 어림없습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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