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더불어 농업, 어업, 목축, 잠업 등 각종 산업의 창시자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용적인 도구를 만들어 인류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 발명가들이다. 우선 생존에 관한 중요한 발명품은 의약일 것이다. 의약의 창시자로는 신농(神農)이 유명하다. 신농은 온갖 풀을 직접 맛보아 각 풀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치료에 응용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의 창시자는 무팽(巫彭)이라는 무당이다. 무산(巫山)이라는 신비한 산에 살고 있는 이 무당은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리며 온갖 약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 무당은 종교적 활동뿐 아니라 치병(治病)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무의(巫醫),주의(呪醫)라는 용어는 본래 무당과 의사가 하나라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인류가 정착생활로 농경을 하게 되면서 만들어낸 중요한 도구는 토기이다.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토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앙소(仰韶) 문화와 용산(龍山) 문화 시기에는 이미 상당히 견고한 토기를 생산해 냈다. 신화에서 토기의 창시자는 요(堯) 임금이다. 요는 이름이 흙 토(土) 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별칭이 도당씨(陶唐氏)임으로 미루어 토기 제작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또한 요산(堯山) 즉 요 임금의 산이라는 곳에서 누런 색 흙(黃堊)이 많이 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역시 요가 토기 제작자임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요는 아마 훌륭한 토기 제작자로서 도신(陶神)으로 추앙되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토기 이후 청동기 등 금속 제련과 관련된 야금술(冶金術)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화에서 이 방면의 창시자로 추정되는 신은 욕수(□收)이다. 욕수는 금속의 기운을 관장하는 금신(金神)인데 고대에 금(金)이라는 글자는 사실 구리를 의미하였다. 야금술과 깊이 상관된 또 하나의 신은 치우(蚩尤)이다. 치우 형제 81인은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먹었는데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어 창, 칼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들은 아마 고대의 대장장이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레의 창시자는 동이(東夷)의 대신(大神) 제준(帝俊)의 후예인 해중(奚仲)이라는 신이다. 그는 어느날 다북쑥 열매가 바람에 불려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것을 보고 수레바퀴를 고안해냈다고 한다. 굽은 나무로 수레 바퀴를 만들고 곧은 나무로 끌채를 만든 다음 말과 소에게 멍에를 씌워 수레를 완성했다. 산해경에 의하면 해중의 아들 길광(吉光)이 처음 수레를 만들었다고도 하니 어쨌든 해중 집안에서 수레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정한 장인(匠人) 집안에서 대대로 수레를 제작하여 기술을 발전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배는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제준의 후예인 번우(番 □)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화호(化狐)가 물고기가 꼬리로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 배를 가게 하였다고도 한다.
주거 공간인 집 또한 신의 창작물로 여겨진다.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태고적에 사람은 적고 짐승은 많아 맹수들로부터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때 유소씨(有巢氏)라는 성인이 나타나 나무를 얽어 집을 지으니 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고원(高元)이라는 사람이 집을 처음 지었다는 설도 있고, 황제가 처음 궁궐을 지었다고도 하며, 곤오가 처음 기와를 만들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설도 있다.
신화는 의복의 창시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황제의 신하였던 호조(胡曹)가 처음 지은 옷은 짐승 가죽을 재료로 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또한 백여(伯餘)가 처음 삼베로 실을 꼬아서 옷을 지었다고도 한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앙소 문화 초기에 이미 삼베 직물이 출현하고 양저(良渚) 문화 시대 즉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면 질 좋은 세마포(細麻布)가 생산된다. 비단 제품은 앙소 문화 말기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무기는 원시 인류가 자연 혹은 상호간의 투쟁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했던 도구이다. 인류는 창, 칼 등 여러 종류의 무기를 만들어냈으나 원시사회에서 활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 무기는 없었다. 활은 대체로 구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였다.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력으로 활은 인간을 짐승보다 우위에 놓이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때문에 활을 처음 만든 사람은 당연히 비범한 존재이기 마련. 산해경에는 소호의 아들 반(般)이 처음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는 동이의 대신 예(□)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황제의 신하인 휘(揮)가 활을, 모이(牟夷)가 화살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음식물 중 신께 바치는 신성한 음료이자 기호품인 술은 누가 발명하였을까? 천제의 딸이 의적(儀狄)이라는 사람을 시켜 처음 술을 빚게 하였다는 설이 있다. 의적은 우(禹) 임금의 신하였는데 어느 날 술을 빚어 바치자 우 임금이 마셔보고 취한 후 "훗날 반드시 이 술로 인해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후 과연 걸왕(桀王)이 나타나 주지(酒池)를 파는 등 술에 탐닉한 끝에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원시 문화 중에서 춤과 노래는 아마 가장 일찍 출현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가무(歌舞)의 형태였다. 산해경을 보면 제준의 아들 8명이 처음 가무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 창시자가 1명이 아니고 8명이나 될까? 원시 문화로서 가무는 집단창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문학과 예술의 신인 뮤즈는 9명으로 되어있다. 산해경에는 음악의 창시자에 대한 기록도 있다. 요산(□山)이란 곳에 불의 신 축융(祝融)의 아들 태자장금(太子長琴)이 사는데 그가 처음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가무가 있으면 악기도 만들어진다. 산해경에는 제준의 아들 안룡(晏龍)이 거문고를, 신농의 후손인 고(鼓)와 연(延)이 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복희가 거문고를, 여와(女□)가 생황(笙篁)을, 황제가 종 북 경쇠 등을 만들었다고도 전한다.
원시 인류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 등과 같이 이미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그림을 남기고 있다. 동양 신화에서는 순(舜) 임금의 이복 누이동생인 과수(□首)가 처음 그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는 황제의 신하인 사황(史皇)이 처음 그림을 그렸다는데 그는 천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 조물주의 솜씨에 견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에 이어 등장한 것이 문자이다. 문자를 가지면서 인류는 완연히 과거와 구별되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 즉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문자는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신화에서는 황제의 신하인 창힐(蒼 □)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용의 얼굴에다 눈이 넷이었다. 신령스러운 눈빛으로 그는 하늘과 땅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새, 짐승 등의 무늬, 발자국 등을 참작하여 문자를 만들어냈다. 그가 처음 문자를 만들어낸 날 하늘에서는 곡식의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귀신들이 한밤중에 통곡을 했으며 용이 모습을 감추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인들이 보았던 문자의 위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문자가 출현함으로써 주술적 세계가 객관 세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의 문명의 창시자들을 살펴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달리 복수 혹은 다수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륙에 거주하던 다양한 종족들이 모두 그들 나름의 창시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의 상당수가 동이계에 속하는 신이거나 인물인 것으로 미루어 중국 문명 초기의 주체가 동이계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창시자들 중 일부는 황제의 신하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후세에 서방 화하계(華夏系) 종족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의도적으로 황제를 문명의 개조(開祖)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에 문명 창시자 대거 등장
고구려 오회분(五 □墳) 4호묘 및 5호묘, 사신총(四神塚) 등에는 문명의 창시자들이 대량으로 그려져 있어 주목을 요한다. 불의 신, 농업의 신, 수레의 신, 대장장이 신, 문자의 신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대부분 신농 및 동이계에 속하는 신들이어서 고대 한국신화와의 친연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벽화에는 인면조(人面鳥), 비어(飛魚) 등 '산해경'의 괴수(怪獸)들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 산해경 역시 동이계 종족의 문화를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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