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9일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작은 촌락 라이게라에서 처형됐다. 39세였다. 그는 하루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체포됐다.살아서나 죽어서나 게바라 신화는 찬란하다. 이미 그의 생전에 철학자 사르트르는 게바라를 '20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격'이라고 찬미했다. 그가 죽었을 때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프랑수아 미테랑은 이 죽음이 자신이 수년 동안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 전세계에 휘몰아친 학생 혁명의 물결 속에서 게바라의 초상과 이름은 해방의 상징으로 나부꼈다. 세계 혁명의 전망이 사라져버린 지금, 게바라의 이미지는 난숙한 자본주의의 교활하고 먹성 좋은 상품광고 속에서 부드럽게 소비되고 있다. 세련됨을 뽐내는 카페의 벽면에도, 일상의 풍요에 권태로운 신세대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이 혁명의 신(神)은 강림(降臨)해 박제돼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합중국 대통령도 게바라의 핀업 사진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혁명가의 초상과 이름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전혀 해롭지 않게 됐다는 뜻이겠다. 게바라는 이제 번영하는 자본주의 속의 세련된 문화적 아이콘일 뿐이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인으로 태어나 쿠바인으로 죽었다. 그는 생전에 여러 나라의 혁명에 간여했지만, 그 가운데 성공한 것은 쿠바 혁명이 유일하다. 게바라는 쿠바 혁명정부에서 중앙은행 총재와 공업 장관을 지냈으나, 이내 새로운 혁명을 위해 제2의 조국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1997년 볼리비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굴돼 그 해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묘지로 이장됐다. 산타클라라는 쿠바혁명 당시 게바라 부대가 정부군을 대파해 혁명전쟁의 분수령이 된 곳이다.
고종석 /편집위원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