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디플레이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그 동안 근근이 버텨왔던 한국 경제의 앞날이 결코 밝은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치욕을 당했던 1997년 대선 당시와 상황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돈의 흐름부터가 정상적이 아니다. 시중에 자금이 넘쳐 나도 기업들은 돈을 쌓아놓을 뿐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8월 중 기업대출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기업들은 요지부동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생산력을 나타내는 생산능력지수가 사상 처음 감소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현재 5%대인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3%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장기간에 걸친 설비투자 부진으로 조로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은 충격적이다. 연구소는 올 상반기 국내 기업들이 사상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지만 이는 매출이 늘어서가 아니라 환율 금리 등 외부 여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전의 환율 금리 수준으로 환산할 경우 도리어 적자여서 상반기 기업들의 실적 호조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개인들은 지나치게 소비를 늘리고 있다. 빚을 내서라도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2·4분기 외상 및 할부구매, 현금 서비스·카드론 등을 통한 가계의 차입성 소비는 8조원에 가까워 전체 소비의 9%를 넘었다. 사상 최고의 차입 소비율이다. 또 가계 소비지출 중 수입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년에 비해 2배 이상 높아졌다. 기업 정부 개인 등 경제주체 가운데 전통적으로 자금이 남아돌던 개인 부문에서 17년 만에 처음으로 자금 부족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소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이미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거품이 언제 터질지 알 수가 없다. 최근 부동산 과열은 과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예전에는 어느 정도 여유 자금을 가지고 투기에 나섰지만 지금은 빚을 내 뛰어들었다. 개인 빚이 크게 증가한 상황에서 집 값이 떨어질 경우 개인들의 대규모 파산은 물론이고 금융기관도 불안해 진다.
부동산 문제가 금융 위기로 직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개인 신용 대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치 자전거를 타고 있어 계속 달릴 수 밖에 없는 딱한 상황이다.
내년 경제를 걱정하는 각종 경고들이 잇따르고 있다. 성장은 둔화하고 물가는 상승하며 경상 수지가 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와 미 스탠퍼드대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한국 경제: 위기를 넘어서'에 참석한 많은 국내외 학자들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한국 경제의 앞날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으며, 위기 경험 국가의 위기 재발 확률이 높은 만큼 언제든지 재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내년에는 정치 외풍 등 비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성장력이 잠식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개인들은 소비를 늘리는 것은 미래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데다 불확실성이 너무 커 앞날을 대비하기가 어려워, 어찌 보면 이런 기업과 개인들의 행동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97년 대선 당시를 다시 돌아보자. 왜 우리가 그렇게 당해야 했던 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다. 문제가 발생할 때만 요란했다가 곧 잊어버리는 '국가적 망각증'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학습 불감증'에 빠져 있을 것인가.
/이 상 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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