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 최후의 미개척지를 다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가 국내에서 출간된지 3개월만에 5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 전 과학담당 기자라는 이력에 걸맞게 작가는 인간의 뇌에 관한 최근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간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소설을 구성했다. 과학기사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지면을 통해 보도된 사실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엔 허구와 적당히 섞여있지만 과연 현대의 과학기술은 어디까지일까? 컴퓨터와 인간의 체스 대결, 뇌수술을 통한 마약중독 치료, 인간의 쾌락중추 연구 등 현대과학의 흥미로운 과제들을 소설 '뇌'의 궤적을 따라 살펴본다.
▶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천재적 체스기사인 사뮈엘 핀처는 슈퍼컴퓨터 딥 블루 ?와 대결, 인간의 패배를 설욕한다. (소설 '뇌')
1996년 IBM은 PC에 밀리는 듯한 슈퍼컴퓨터의 재기를 선전하기 위해 딥 블루를 개발, 세계 체스 챔피언인 게리 카스파로프와 대결시켰다. 결과는 카스파로프의 낙승. 그러나 다음해 성능이 향상된 딥 블루는 2승3무1패로 인간을 꺾었다.
1997년 언론은 '컴퓨터의 승리'를 크게 보도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뇌에 대한 우월성은 견고했다. 바둑만 봐도 컴퓨터의 기력은 아마추어 하급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 체스는 64칸의 체스판에 두지만 바둑은 가로 세로 각 19줄 즉 361개의 둘 곳이 있다. 돌 놓을 자리가 바둑이 진행될수록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해 평균 200곳만 잡아도 돌을 4번 응수할 경우의 수가 200x200x200x200=16억가지나 된다. 더 복잡한 게임에서 컴퓨터는 인간에 도전장조차 내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딥 블루보다 훨씬 개선된 현재의 슈퍼컴퓨터는 바둑에서도 인간을 제압할 수 있을까? 국내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노벨'. 노벨은 128개의 CPU로 초당 3,064억번 계산을 할 수 있고 내년 576개 CPU가 추가되면 초당 4조2,400번으로 빨라진다. 딥 블루의 연산속도는 초당 2억번 정도였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슈퍼컴퓨팅응용실의 김정호 박사는 "현재의 계산능력이라면 프로 바둑기사와 견줄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계산능력이 아닌 알고리즘, 즉 소프트웨어다. 최강의 슈퍼컴퓨터가 바둑의 수를 계산하더라도 바둑프로그램은 그 중 어떤 수가 유리한 것인지 잘 모른다. 체스 프로그램은 왕을 잡는다는 목적에 따라 말의 중요도에 가중치를 매겨 유리한 수를 선택하지만 바둑에선 전체 판을 살펴 돌 하나 하나의 유·불리를 따지도록 프로그램화하는 게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인간과 겨룰 바둑 프로그램 개발이 인공지능 연구의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체스 승리 후 핀처 박사를 복상사(腹上死)하게 만든 약혼녀 나타샤 안데르센은 정작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마약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뇌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 '뇌')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인간 뇌 연구소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으로 인한 만족을 관장하는 뇌 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을 한다. 러시아인은 4,000달러, 외국인은 8,000달러에 수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술법은 논란이 매우 심하다. 수술을 받은 환자 가운데 정상생활로 돌아간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약을 다시 시작해 의사를 고소한 경우도 있다. 러시아 학술원 회원들은 대체로 "마약중독을 담당하는 뇌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며 수술법을 불신하고 있다. 때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조차 치료 목적의 수술이 아닌 실험을 위한 수술이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김창윤 교수는 "강박장애의 경우 뇌의 전두엽, 시상, 선조체를 잇는 회로에 문제가 생겨 한가지 생각이 빠져나오지 않고 빙빙 도는 것인데 이를 연결하는 신경섬유를 절제하는 수술이 있다"며 "이론적으로 중독도 이러한 수술치료가 가능하나 다른 치료법이 있는데 굳이 부작용이 있을지 모를 수술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 핀처 박사는 뇌 수술을 통해 쾌락중추에 전기자극을 받음으로써 체스실력을 월등히 향상시켰다. 결국 '쾌락'이 인간 행동의 동기를 이루는 '최후의 비밀'이었다는 사실이 두 기자에 의해 밝혀진다. (소설 '뇌')
인간의 뇌는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쾌락중추가 인간이 느끼는 만족감과 성적 쾌락을 유일하게 관장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뇌 연구자들은 도파민이 인간의 쾌락에 관여하는 중요한 신경전달물질로 꼽는다. 도파민은 뇌 안쪽의 신경계 중 '도파민 핵'이라고 불리는 부분에 집중돼 있다.
사실상 도파민 핵은 다른 뇌 부분과 연결돼 욕망과 호르몬 조절, 분노·공포 등 감정, 기억과 학습, 미세한 운동조절, 인간의 특징인 사고과 창조력 등에 모두 관련된다.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는 "알코올, 담배, 마약, 인터넷 등 모든 중독이 결국 도파민 핵의 신경계와 관련돼 있고, 말과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파킨슨병도 도파민 문제로 일어난다"며 "도파민이 과다하면 환각, 정신분열 등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뇌의 어느 부분이 기능하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fMRI가 개발되면서 연구자들은 뇌 각 부분의 역할을 규명하는 '뇌 지도'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유일한 수단이 곧 뇌라는 역설이 뇌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을 던져준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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