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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한국 전쟁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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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한국 전쟁의 기원

입력
2002.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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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나는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음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떤 거창한 포부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음악에 남다른 재능과 조예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인문대학과는 좀 다른 신선한(?) 경험이 필요했다.내가 학부를 다니던 80년대 전반은 혁명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 때였다. 전공과 상관없이 역사와 사회과학은 당시 철부지 청년 지식인들에게 필수 교양 과목이나 진배 없었다. 나는 그 숱한 불온 문서의 목록들을 조소하면서도 그 책들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홍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니 운동권이니 상관없이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매력적이고 논쟁적인 이야기이다. 다종다양한 혁명사는 젊은 피를 끓게 만들었고, 우리의 근대사 책들은 지금―여기 우리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제공하는 데 가장 유용한 재료였다.

하지만 1986년에 만난 이 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만큼 역사에 대한 내 영혼의 갈증을 통렬하게 만족시켜준 책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나는 이 책을 손에 쥐자마자(어떻게 이 책을 사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무협지를 밤새워 독파하듯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꼼꼼히 음미하며 다시 읽었다. 한반도 현대사의 분기점인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45년 해방 때부터 시작된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브루스 커밍스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논객들에게 마치 재앙과 같은 존재로 홀대받고 있지만 도대체 그것이 나의 감동에 무슨 상관이랴!

이 책은 근엄하고 권위적인 거개의 역사책과는 달리 역사를 풀어가는 날렵하면서도 치밀한 수사학이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달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 국무성의 G2 비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풍부한 참고자료는 제한된 사료의 한계로 인해 관점을 인위적으로 강조하는 국내 진보적 사학자들의 저서들이 풍기는 관념적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

음대 대학원 1학년 때 나는 이 책으로 역사에 대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 책에 값하는 수준의 음악사학자가 되겠다는 치졸한 꿈도 꾸었다. 그때의 꿈은 지금 온데 간데 없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귀의할 곳이 있다면 바로 한국 근대의 음악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좌표가 바로 이 책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강 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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