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1주기를 앞두고 어수선하던 9월3일,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1919∼2001)의 1주기를 기념, 그녀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담은 '잔광: 폴린 카엘과의 마지막 대화'가 출판돼 이곳 영화 애호가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뉴욕타임스와 뉴요커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는 저자 프란시스 데이비스는 어느 비오는 토요일 저녁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일을 따스하게 기억하는 서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죽음을 1년 앞두고 데이비스와 나눈 대화에서 81세의 카엘은 "나쁜 영화에 대해 평을 쓰는 것은 피부에 좋지 않다"면서 영화평 쓰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이곳 미국에서는 영화 비평하면 폴린 카엘을 떠올릴 만큼 그녀가 미국 영화 평론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카엘은 1년간 할리우드에서 제작에 관여한 것을 제외하면 1968년부터 1991년까지 20여년의 세월을 뉴요커지에서 영화 비평가로 줄곧 일해왔다. 그녀의 독특한 시각과 강렬한 어조는 비평계에 파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1953년 당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던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를 비판하며 영화평론계에 등단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탕발림이라는 이유로 맹공을 가했다.
반면 1967년 개봉 후 무관심 속에 묻힐 뻔한 '보니 앤 클라이드'에 찬사를 보냈고 1972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뉴욕 영화제에서 초연 되었을 때, 이는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초연한 1913년 5월29일처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하여, 그녀의 평 자체가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데 기여하였다.
폴린 카엘의 독특한 평론 스타일은 '폴렛'이라 부르는 추종자들을 낳을 정도였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같은 영화를 한번 이상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카엘은 영화 감상의 경험은 이론이나 형식에 의존한 것이기보다는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버클리에서 철학을 수학한 그녀의 평론은 정치나 문학을 아우를 만큼 폭 넓고 지적이었지만, 관념이나 유미주의로 포장된 위선적인 영화들에 대해 가장 분노하였다. 카엘은 특히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봉자인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가 주창한 '작가주의'에 반론을 제기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에서 그녀는 작가라는 명목하에 한 감독이 만든 모든 작품을 다같이 높이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곳에선 뉴욕 영화제가 한창이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과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등 우리나라 영화가 두 편이나 초청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자신이 믿는 바라면 독설이건 격찬이건 서슴지 않았던 카엘이 살아있다면 이들 영화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박상미 재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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