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한 분야를 대라면 대부분 주저 없이 정치를 꼽는다. '정치만 잘 되면 정말로 괜찮은 나라가 될 수 있는데…'하는 탄식이 나온 게 어제 오늘이 아니다. 지난 6월의 월드컵 때만 해도 '지도자만 잘 만나면 우리도 잘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상식처럼 통했다. 국가대표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는 수입할 수 있지만 정치인과 지도자는 그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농담처럼 오갔다.대통령 선거가 80일이 채 남지 않았는데도 뚜렷한 정책쟁점이 부각되지 않고 있고, 진흙탕 싸움만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한나라당이 정부에 대해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는 4억 달러 대북 비밀 제공설이 과연 사실인지, 민주당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두 달째 괴롭히고 있는 병역비리 의혹의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두 사안 모두 과거의 일로 미래지향의 정책 대결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정치가 낙후성을 탈피하기 위한 급선무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방향이라도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둘도 없이 좋은 기회가 국민이 모처럼 힘을 발휘하는 선거다. 각 후보에게 정치개혁의 청사진을 요구하고 이를 표로 심판하자는 것이다.
정치개혁은 지향점과 방향은 달랐지만 역대 어느 정권이나 의욕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달리 대부분 미완에 그쳤고,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가 허다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사자가 당사자를 개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출범 초기에 중앙당의 축소를 강하게 밀어 붙였고 내친 김에 지구당 폐지를 검토하는 등 돈 안 드는 정치를 하고자 했다. 전격적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척결을 통한 군의 정치개입 배제 등은 성공했지만 정치개혁은 실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도 국가부도 위기라는 비상사태 아래서 금융개혁과 기업구조조정 등을 성공시켜 IMF를 조기 졸업했지만, 정치개혁은 말만 앞세웠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주당에 정치개혁특위를 설치하고 대통령이 대표로부터 매주 주례보고를 받으며 독려했지만 아이디어만 무성했지 결과는 초라했다. 영수회담의 합의로 국회에 정치개혁을 전담하는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정치개혁특위는 활동시한을 거듭 연장하면서 지금도 겉돌고 있다.
대선에 임하는 각 정당과 후보진영도 정치개혁의 필요성에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치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바로 잡을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약속한 정치개혁마저도 이를 부정하거나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그랬다가는 선거에 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대권과 당권의 분리를 수용, 후보와 대표를 따로 뽑았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의 전권을 휘두른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자랑했던 국민참여 경선제를 통해 후보를 선출했다. 하지만 당선가능성이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후보 교체를 저울질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신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도전하겠다는 정몽준 의원은 출마 이유로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정치개혁이 무엇인지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12월 대선의 정책대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정치개혁의 알맹이 제시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을 간과한다면 또 다시 5년동안 '정치만 잘되면 나라가 좋아질 텐데…'하는 푸념을 하게 될 것이다.
이병규 논설위원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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