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60) 일본 총리가 모처럼 '잘 나가고' 있다. 작년 4월 출범 당시만 해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평을 받던 고이즈미 총리는 최근 들어 북·일 정상회담을 성공시키는 등 독자외교의 폭을 넓히는 한편으로 만성적인 경제위기를 타개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임으로써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는 이 같은 상승세를 계기로 9월 30일 개각을 단행하고 정권 2기의 승부수를 던졌다. 외교에서는 북한·일본 국교 정상화, 내정에서는 국제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실채권 처리를 양대 목표로 분명히 내걸었다. 역대 어느 정권도 해결하지 못한 두 난제를 그가 어떻게 처리해나갈지는 국제 정치·경제 질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북일 국교정상화
올들어 30∼40%대로 곤두박질쳤던 고이즈미 내각 지지율은 역사적인 9·17 북·일 정상회담 이후 60∼70%대로 경이적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역대 내각 지지율 상승폭 가운데 최고 기록이다.
일본인 납치문제로 북한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 국민들은 그래도 고이즈미의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고이즈미는 완전 물갈이를 요구하는 자민당 내 반대세력을 억누르고 이번 소폭 개각으로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개각 직후 고이즈미는 "장래의 일·북 관계를 적대관계에서 협조관계로 바꾸는 것이 두 번 다시 납치사건 같은 고통을 국민에게 안겨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해야 하며 일본도 북한도 노력해야만 한다"고 확고한 국교 정상화 의지를 밝혔다.
그는 특히 납치문제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내던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조기에 구출하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의원을 방위청 장관으로 전격 발탁했다. 이는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납치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는 의지를 과시하면서도 정상화를 둘러싼 여러 이견을 내각 안에서 녹여내겠다는 묘수로 보인다.
지난해 8월과 올해 4월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한국·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외교 음치'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그는 북·일 정상회담 이후인 9월 23일 덴마크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해 당당히 주역으로 떠올랐다. 또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동북아 6자 협의를 관련국들에게 잇달아 제안하며 동북아에서 일본의 조정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26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도 고이즈미 총리는 6자 협의나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강조하며 외교 이니셔티브를 쥐려고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납치문제가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경우 '북한 도박'은 국내외에서 순식간에 역풍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부실채권 처리
고이즈미 총리는 개각 직전에 밝힌 2기 정권 기본방침에서 "정부와 일본은행이 하나가 돼 디플레이션 극복에 매진하고 2004년도에는 부실채권 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밝혔다.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재무성 장관도 9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공적자금 투입을 배제하지 않고 2004년까지 부실채권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3월 말 현재 52조3,000억 엔으로 집계된 금융기관 부실채권 처리 시한을 국내외에 공약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개각에서 부실채권 처리를 위한 공적자금 투입에 반대해 온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 담당 장관을 경질하고 찬성론자인 나케나가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 담당 장관이 겸임토록 했다. 이는 그 동안 "금융위기 상황이 아니다"라며 공적자금 투입을 꺼려 온 고이즈미 총리가 더 이상 부실채권 처리를 미룰 수 없다고 보고 정책전환을 꾀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의 증시 침체로 대형 시중은행들은 총 4조 엔의 주식평가손을 입어 9월 말 반기결산에서 배당조차 못할 형편이다. 고이즈미 정권은 금융 위기 예방 차원에서 공적자금 투입이 가능하도록 예금보험법상의 절차를 간소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리회수기구(RCC)가 부실채권을 사들일 때 매입가격을 현재의 시가 기준에서 장부가 기준으로 바꿔 금융기관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증시침체로 인한 은행의 평가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은행 보유 주식을 중앙은행이 매입해 주는 비상조치는 이미 추진 중이다.
그러나 국가채무액이 6월 말 현재 627조3,900억 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정부 재정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 공적자금 투입은 세 부담을 안아야 하는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규모 부실채권 처리는 새로운 디플레이션 압력을 유발할 수도 있다.
거품 경제 붕괴 후 1990년대 10여 년간 역대 정권이 '시한폭탄 돌리기'를 하며 미루어 온 부실채권 처리는 고이즈미 정권 2기에서 초읽기에 몰린 셈이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 "대통령형 총리" 고이즈미 정치 스타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방문을 결정할 때나 이번 개각 때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나홀로 결단'을 고집했다.
자민당 내 주요 파벌 보스들과 물밑에서 사전에 조율을 하고 공명당·보수당 등 연립 여당 대표에게 미리 이해를 구하는 과거 일본 총리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다.
자민당 내 파벌 기반이 없이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총리가 된 그는 지난해 정권 출범 초기 "자민당을 깨부술 각오"라며 파벌정치 개혁을 내걸었다. '선거용 총리'로 단명할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고이즈미는 특유의 결단력과 돌파력으로 자민당 내 반대세력과 야당의 흠집내기를 견뎌내고 있다.
이번 개각에서는 자민당 파벌 안배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책운용의 기본방침을 입각 대상자들에게 제시해 미리 준수 약속을 받아낸 뒤 임명을 발표하는 독자인사를 관철시켰다. 자민당과 연립 여당 내에서는 "히틀러식 독재"라는 등 불만이 새어 나왔지만 누구도 내놓고 비난하지는 못했다.
높은 지지율을 기반으로 '개혁의 기수' 이미지를 굳힌 고이즈미는 반대세력을 '구악(舊惡)'이나 '개혁 저항 세력'으로 규정해 국민의 표적이 되게 만드는 정치수법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의원과 관료가 유착하는 자민당식 정치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고이즈미의 정치스타일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통령형 총리'가 바람직하다는 게 고이즈미 총리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개각을 통해 정책결정 기능을 당에서 내각으로 집중시켜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이미 지난 정기국회 때 우편업무 민영화 관련 법안을 자민당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고 국회에 상정해 통과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자민당 내 반대 파벌들은 속으로 불만이 많아도 '포스트 고이즈미'로 나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얼굴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꼴이다. 9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가 경선 끝에 간신히 3선에 성공했지만 경선 후유증에 휩싸인 제1야당 민주당의 혼란도 고이즈미에게는 호재다.
정치권과 언론 등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예상 외로 장기 집권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2기 내각 출범 "총리의 기본 방침"
작년 4월 (정권 출범) 이후 1년 5개월간 구조개혁에 매진해 왔지만 지금까지의 경험과 성과를 토대로 '개혁 없이 성장 없다'는 노선을 확고히 궤도에 올린다. 이를 위해 다음의 방침에 근거해 구조개혁을 진행할 새 체제를 구축한다.
1. 경제 활성화 앞으로 반년간 구조개혁을 가속시키기 위해 정책을 강화한다. 일본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정부와 일본은행이 일체가 돼 디플레이션 극복에 매진, 2004년도에는 부실채권 문제를 종결시킨다.
2. 행정·재정 개혁 비대해진 공적 부문의 발본적 축소에 계속 힘써 '관에서 민으로', '국가에서 지방으로'의 변화를 일층 가속화함으로써 활력 있는 민간과 개성 있는 지방이 중심이 된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도로공단 개혁에 관해서는 도로 관계 4공단 민영화 추진위원회의 최종 의견을 존중한다. 우정공사를 우정 민영화의 첫걸음으로 보고 준비를 진행한다.
3. 외교 국제 협조를 계속 중시, 일본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한다. 특히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 교섭을 재개해 지역의 불안정 요인을 제거하는 데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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