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텔미 썸딩' (99년 11월 개봉) 이후 3년 만이다. 배우에게 3년이란 공백은 그리 큰 것도 아니건만,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한국 최고의 스타인 한석규(38)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궁금증도 컸고, 광고에만 얼굴을 내미는 그를 보는 눈도 곱지만은 않았다.그런데도 그는 장고(長考)를 계속했고, 마침내 '이중간첩' (감독 김현정)을 선택했다.
'이중간첩'의 프롤로그 부분을 찍고 있는 체코 프라하에서 2일 그를 만났다. 그는 북한의 동유럽 정보담당 요원인 주인공 림병호(한석규) 역으로 동베를린을 탈출해 위장 귀순하는 장면을 촬영중이다. 검게 그을린 얼굴, 영화를 위해 기른 수염, 살이 5㎏나 빠져 약간 야위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돌아온 스타의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나.
"의도적으로 쉰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넘어가다 보니 3년이나 됐다. 배우란 선택도 하지만 선택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나만 잘났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시나리오가 무수히 들어왔을텐데.
"3년 동안 100여 편 쯤 된다. 그 중 읽은 것만 50편. 솔직히 '박하사탕'을 빼면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텔미 썸딩'과 시기가 비슷해 못했다. 그 때는 스릴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이창동 감독과 다시 같이 작업 못 한 게 아쉽다."
―그래도 영화의 인기로 CF에만 나와 편하게 돈을 번다는 비판이 있는데.
"배우에게는 CF도 굉장히 중요하다. 수입, 관객과 연결고리,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영화 선택 이상으로 고르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에서 내 역할은 장르에 충실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품을 기다리느라 3년을 보낸 것 같다."
―그 사이 설경구 송강호 유오성 최민식 같은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 초조하지는 않았나.
"나름대로 그릇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제 자리를 찾아서 그만큼 남자 배우의 폭이 넓어진 것이 아닌가. 3년 동안 쉬면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 편안해졌고, 내 위치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을 충분히 정리했다."
―'이중간첩'을 선택한 이유는.
"첫 인상이 너무 좋았다. 지난 3월 시놉시스를 읽고 해볼 만한, 꼭 해야 될,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림병호란 인물도 매력적이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한가지 신념으로 끝까지 살아가다 상황 때문에 좌절하는 인물이다. 6, 7년 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같은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림병호야말로 비슷한 인간이 아닐까. 이것을 안 하겠다고 하면 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 분단이란 소재는 진부하지 않나.
"아직도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해외시장에서 경쟁력도 있다. '쉬리'가 대결, '공동경비구역 JSA'가 화해라면 '이중간첩'은 분단의 내부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쪽에 의해 희생되는 북쪽 인물을 통해 80년대 남한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영화다."
―역시 한국영화 최고 수준의 출연료를 받은 걸로 아는데.
"4억 5,000만원에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했다.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투자자에게 그 이상의 이익을 돌려 주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비판도 있지만 출연료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 시장이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앞으로는 영화에서 좀더 자주 한석규를 볼 수 있나.
"솔직히 '이중간첩'을 끝내고 5년을 쉴지, 1년에 5편을 할지 모르겠다. '추억으로 남는 영화'를 하고 싶다. 관객들의 평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더욱 작품 선택이 까다로워진 건지도 모른다."
/프라하=이대현기자 leedh@hk.co.kr
● 이중간첩
'이중간첩'은 외형상 스파이 영화다. 위장 귀순한 북한 간첩 림병호가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으로 들어가 일급 정보를 빼내 북한에 보내려다 희생당하는 이야기. 영화는 여기에 고정간첩인 방송사 아나운서 수미(고소영)와의 사랑과 그로 인한 림병호의 갈등, 림병호를 희생양으로 삼는 안기부를 통해 분단의 비극성과 위악성을 드러낸다.
결국 이중간첩은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없다. 림병호는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처럼 제3의 땅으로 가지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피에 불과하다. 북은 신념을 지킬 수 없게 하고, '자유'의 남에서는 자유가 고문 당하고 죄가 조작되는 현실.
'이중간첩'은 6월 11일 촬영을 시작, 현재 50%를 찍었다. 제작비는 43억원. 림병호 위장탈출 장면을 독일이 아니라 '리틀 베를린'이라 불리는 체코 프라하의 폴레쇼비치에서 오픈세트를 지어 찍고 있다. 체코 스태프 60명이 참가했고, 엑스트라 80여 명이 동원됐다. 카페 종업원 의상까지 80년대 동베를린 거리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국내에 돌아와 나머지 촬영을 11월 말까지 마칠 예정. 개봉은 내년 1월 24일.
김현정(29)감독은 서울예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단편 '고수부지의 개자식들'을 연출했으며 '공공의 적' 시나리오를 썼다. "스릴러, 액션이 아닌 인물에 깊이 들어가는 영화가 되도록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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