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000억원은 대북 비밀지원이 아니라 당시 그룹 분할과정에 있던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 회장측의 계열사 지분매입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도 "정부 입장에서는 대북 사업에 적극적이던 정몽헌 회장을 중심으로 현대를 안정시킬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라며 "정부가 지분정리용 대출을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 맡겼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000년 5월말∼6월중순 현대 상황
현대는 2000년 3월 왕자의 난(몽구·몽헌간 경영권 다툼) 직후 현대차 계열을 그해 6월말까지 현대에서 완전 분리하겠다고 천명했다. 현대의 34개 계열사를 몽헌 그룹(건설 전자 상선 상사 증권 등)과 몽구 그룹(현대차 기아차 현대강관 현대캐피탈)으로 재편하겠다는 것. 5월말 이후 지분정리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은 건설·상선·중공업 지분을 팔아 그룹 총수에서 물러나고 당시 계열분리의 걸림돌이었던 현대중공업 소유 현대차 지분을 인수했다. 또 정몽헌 회장측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현대계열 지분과 정몽구(鄭夢九) 회장이 가지고 있던 정몽헌 회장측 계열사 지분을 인수했다.
■몽헌측의 정주영 명예회장 지분 인수
정몽헌 회장 계열의 현대건설은 5월25일 432억원을 들여 정주영·정몽헌 회장 소유 현대상선 지분을 인수, 현대상선 최대주주(23.86%)가 된다. 5월26일에는 현대 7개사가 현대아산에 1,357억원을 출자하는데, 이중 정몽헌 회장측의 출자분만 1,010억원이었다. 또 5월29일에는 정몽헌 회장 자신이 정주영 명예회장 소유 현대건설 지분 419억원 어치를 인수, 현대건설의 최대주주(7.66%)가 되며, 현대상선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대건설 소유의 현대중공업 지분(1,934억원)을 인수,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12.46%)가 된다.
■몽헌측의 몽구측 지분 인수
산은으로부터 4,000억원을 지원받은 직후인 6월9일에는 정몽헌 회장측이 정몽구 회장 계열사들의 현대 지분을 거둬 들였다. 현대전자가 현대차 소유 현대유니콘스 주식(95억원)을 비롯, 현대상사(73억원)와 현대경제연구원(35억원) 주식을 매입하는 등 이날 하루 정몽헌 회장측이 매입한 계열 주식은 313억원 어치다. 이에 따라 정몽헌 회장 본인과 계열사들이 5월25일부터 6월9일까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 회장측으로부터 지분을 사들이거나, 현대아산 출자에 사용한 돈은 총 4,108억원에 달한다.
■지분확대 유용 가능성
당시 현대건설 등 정몽헌 회장측 계열사들은 매일 매일 돌아오는 채무를 막기에도 급급해 지분확대용 자금을 조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6월7일 인출된 4,000억원 중 일부는 6월9일 정몽구 회장측 지분 인수대금과 6월7일 이전 정주영 명예회장 지분을 인수하는데 사용했던 급전 메우기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5월25일 현대상선의 현대전자 주식처분대금 1,444억원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6월7일과 12일 현대건설의 기업어음(CP) 1,400억원 어치를 사줘야 했다. 현대상선 관계자들도 "현대그룹과 관련해 사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공개하면 불이익을 볼 기업 등이 있어 밝힐 수가 없다"고 말해 산은 대출금이 유용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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