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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동포는 문화에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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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동포는 문화에 목마르다

입력
200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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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리진이라는 동포시인이 있다. 김일성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중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며 북한에 반체제운동을 벌이다가 구 소련에 망명했다. 망명 이듬해인 1958년 '구부정 소나무'라는 시를 썼다. 자작나무 숲과 경쟁하는 러시아 소나무는 대부분 곧게 자란다. 그는 굽은 소나무에서 눈물겨운 조국을 본다.<…멀리서 아끼는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아느냐/ 길 떠난 아들을 잊지 마라/ 구부정 소나무의 내 나라> (부분)

모국에 대한 향수를 주원료로 시를 써온 그의 소련 망명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망명이 자유세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선입견 때문이다. 원래 중국 간도와 함께 러시아는 우리 민족이 해외이민을 시작한 초기 개척지였다. 1830년대 계절영농 이민자들이 연해주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뒤 항일 이민이 뒤따랐으나 1937년 소련 정부는 19만 동포를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억울함과 고달픔 속에도 이들은 뽑아 내던져진 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는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왔다. 러시아 연해주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구 소련지역의 동포는 52만여명(2001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의 동포는 미국(212만) 중국(188만) 일본(64만) 다음으로 많다. 동포는 네 번째로 많지만, 조국과의 문화적 교류에서는 아직도 멀고먼 변방이다.

지난 추석 무렵 바이칼 호수 근처 이르쿠츠크시의 대형 식료품 상가를 찾았다. 한 코너에서 동포 여인 너댓명이 나란히 일하고 있었다. 김치와 나물 등 낯익은 우리 음식을 판매하는 여인들은 상냥하고 교양이 있어 보였다. "낼 모레가 추석인데…"라고 말을 붙이자 "우리는 추석은 쇠지 않고 러시아 명절을 같이 즐긴다"는 답이 돌아왔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함에 감전되는 듯했다.

동포들은 러시아인 세시풍습에 삶의 시간표를 맞추며 살아도, 결혼은 핏줄의 부름에 따라 대개 민족끼리 하고 있다. 사회관습과 개인적 정서가 잘 맞지 않을 때, 정체성의 혼돈이 싹트고 문화적 소외감이 자란다. 남북한 모두 이 문제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다. 변방의 동포에게 뿌리에 대한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는 데 등한했다.

최근 러시아 박물관에서 한국민족문화실이 문을 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시 아르세니예프 연해주립 박물관의 한국실 개관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차라리 너무 늦게 찾아온 경사다. 도자기와 금속인쇄기술, 한글발명 등 우수한 전통문화를 알리는 120여 점의 민속품이 전시되었다. 알찬 내용이었으나,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너무 강조하려 한 조급함도 보였다. 겨레의 흔적과 체취가 자연스레 공감되도록 전시품과 공간을 더 늘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훌륭한 박물관을 짓고 관리하는 나라와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박물관은 민족의 생명력이 배양되는 교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외동포수가 565만에 이르는 '동포 부국'이 되었다. 동포가 1만명 이상 살고 있는 나라도 17개국에 이른다. 우리는 연해주 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와 중남미 등에도, 특히 소외된 지역에 한국문화실을 지어야 한다.

또한 그 반대의 시도로서, 국내에 이민사 박물관 건립을 제안하고 싶다.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간 장엄한 행렬을 증언할 자료를 집대성하는 데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고난과 성취의 흔적은 오사카의 한국인 시장과 하와이 사탕수수밭, LA와 뉴욕, 옌볜-상하이, 연해주-중앙 아시아, 캐나다, 브라질 등에 가득히 깔려 있다. 급속한 문명화와 타민족과의 동화로 이민의 자취가 사라지기 전에, 그것들이 안주할 집을 지었으면 한다. 이는 민족에게 큰 시련과 도약을 가져온 20세기가 남긴 숙제이기도 하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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