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의 분열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조만간 현실화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는 적전 분열 양상과 다름없었고 5공 정권이 생각을 품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4월13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본인은 지금까지의 소모적 개헌 논의를 그만두고 현행 헌법으로 88년 2월의 정권 교체와 올림픽이라는 양대 행사를 치른 뒤에 다시 개헌 논의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울러 민정당은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물 중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것입니다."
4·13 호헌 조치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 역행한 것이었다. 통치권자의 결단이라는 형식으로 정치를 부정한 것이었다. 신군부가 짜 놓은 기본 통치 얼개를 허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군정 청산과 민주화를 위해서는 직선제 개헌이 해결책이라는 국민 정서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든지 호헌만은 철회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개헌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여당의 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1년은 합의 개헌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치 상황이 갈수록 불투명해져 가는 가운데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씨는 5월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에서 탈당한 73명의 의원 가운데 66명이 통일민주당에 참여했다. 통일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부상한 반면 신민당에는 28명의 의원이 남았다.
정치권과는 별도로 호헌 조치에 대한 사회 각계의 저항이 거세게 일었다. 대한변호사협회를 필두로 각계 각층에서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종교인 학자 문인 언론인 등의 항의 성명과 집회, 시위, 단식 농성 등이 그칠 날이 없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여론은 일시에 폭발했다.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내각 총사퇴에 견줄 만한 큰 폭의 물갈이가 불가피했다. 노신영(盧信永)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이한기(李漢基) 서울대 교수가 총리에 취임했다.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도 안무혁(安武赫)씨로 교체됐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여론을 잠재울 수 없었다. 5월27일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범 민주세력이 힘을 합친 것으로 반(反) 군사독재, 민주화 투쟁이 제도권이 아닌 장외에서 격렬하게 벌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6월에 접어 들면서 잠재한 국민의 반 군사독재 성향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야 운동권에서는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 치사 은폐 조작 및 호헌 철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10일 대회를 두고 국민당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분명했다. "이 정권의 부도덕성은 규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는 국회 안에서 하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데 대해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에게 깊이 반성하는 게 도리이다." 국민당이 통일민주당 및 재야 운동권과 보조를 맞추지 않은 데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할 일이지만 당시 나로서는 원내 투쟁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맞서 정부 여당은 "4·13 조치는 불변의 원칙으로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2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핵심 간부회의를 열어 노태우(盧泰愚) 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추천하고, 6월10일 전당대회에서 이를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권 세력과 범민주 세력은 6월10일을 목표로 각각 앞만 보고 내달렸다. 서로 마주 보고 달려 가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대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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