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영원한 10월 여행 테마다. 지난 달 말 설악산에서 출발한 단풍의 불꽃이 남하를 시작했다. 다음 달 초까지 전국의 산하는 겨울을 준비하는 화려한 색채의 잔치를 벌인다. 눈부신 단풍 속으로 미리 들어가보자.
호남 제일의 돌산 월출산(808m·전남 영암, 강진군). 나뭇가지가 앙상하던 초봄에 이 산에 올랐다. 숲에 가리지 않은 바위를 보기 위해서다. 과연 짐승의 무리처럼 도열해있는 아름다운 바위산을 볼 수 있었다. 고작 800여m의 낮은 산이라고 만만하게 보았다가 혼쭐이 났지만 가슴 뿌듯한 보람이 있었다. 하산주(下山酒)를 마셨던 식당 아주머니가 말했다. "단풍이 들면 한 번 더 오셔라잉. 그 때가 진짱게." 그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지난 해 10월12일, 60% 정도 단풍이 물든 월출산을 미리 취재했다.
7시간 가까이 차를 달려 도착한 월출산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찬 기운을 머금은 전형적인 가을비였다. 그 추적거림에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도 있었지만, 확 트인 조망을 기대하기 어려워 실망감이 앞섰다.
출발지는 월출산의 동쪽 입구인 천황사. 천황사에서 구름다리를 거쳐 정상인 천황봉에 올랐다가 구정봉-억새밭을 거쳐 반대편인 도갑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월출산 산행의 가장 일반적인 등산로다. 8.5㎞로 6시간이 걸린다.
천황사 입구에는 드문드문 단풍이 들었다. 아직 가을은 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푸른 숲을 배경으로 한 단풍의 색깔은 유난히 붉었다. 구름에 가려 산의 높은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곳은 분명 불바다로 변해 있으리라. 빗속에서도 예감이 좋았다.
천황사는 등산로 입구에서 약 400m. 단풍터널이 아니라 대나무 터널이다. 가지가 얇고 잎이 큰 산죽이 사람 키의 두배 정도 자라있다. 대잎이 하늘을 가렸기 때문에 여명처럼 어둡다. 그 어둠 속은 온통 풀냄새다. 눈을 감는다. 서걱서걱 대나무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린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좋은 기운이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대나무 터널이 끝나는 부분에 천황사가 있다. 큰 절은 아니다. 신라 때의 절터에 1905년 누군가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를 시작했다. 지난 해 작은 절집마저 불에 탔다. 복원불사가 진행중이다.
천황사부터 길은 솟구친다. 잠시 길이 험한 것이 아니다. 천황봉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계속된다. 호흡조절과 체력안배를 잘 해야 괴롭지 않은 산행을 할 수 있다. 쇠난간을 부여잡고 네 발로 돌길을 오르기를 약 한시간. 앞서 고개를 넘었던 등산객들이 환호한다. 구름다리에 도착한 것이리라.
월출산의 명물 중 하나인 이 다리는 국내 구름다리 중 가장 높은 곳에 걸려있다. 길이는 약 20여m에 불과하지만 아래의 낭떠러지는 200m이다. 스릴 만점이다. 다리의 중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
예감은 적중했다. 구름다리 부근부터 단풍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붉은 빛도 좋지만 특히 노란 불꽃이 강렬하다. 구름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이 압권이다. 붉고 노란 단풍이 오색 열대과일을 펼쳐 놓은 듯 바위 골짜기를 채우고 있다. 오금이 저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한 등산객이 아래를 잠시 내려다 보더니 용기를 냈다. 난간을 잡고 한참 단풍에 취해있다.
단풍은 계속 이어졌다. 구름다리부터 천황봉까지의 약 2시간 산길은 난코스 중의 난코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이어지는 절벽에 가까운 돌길이다. 그러나 바위를 비집고 난 단풍의 붉은 빛을 구경하느라 힘이 드는 줄도 몰랐다. 등산객마다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다. 산행의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혹 필름 남는 것 없습니까"고 물어 온다.
드디어 천황봉. 호흡이 저절로 멎는다. 사방은 온통 바위의 바다이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최고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햇살처럼 펼쳐져 있다. 사나운 짐승의 떼가 우두머리를 향해 도열한 것 같다. 바위 사이로 단풍이 들어있다. 짐승의 혓바닥 같다.
천황봉에서 구정봉까지는 마루금(주능선) 산행이다. 양쪽의 단풍 기슭을 여유있게 구경하면서 걸을 수 있다. 구정봉은 정상에 아홉 개의 물웅덩이가 있는 봉우리. 물웅덩이는 욕조만한 것부터 바가지만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 곳의 물은 마르는 법이 없어 기우제를 지낼 때 모셔가기도 한다.
구정봉에서 약 30분의 너덜지대를 통과하면 마지막 쉼터인 억새밭에 이른다. 힘든 산행은 일단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먼 발치에서 바위 사이의 단풍을 보았다면, 이제 단풍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좌우, 하늘 모두가 단풍이다. 단풍 그늘 속에서 등산객의 얼굴에도 노랗고 붉은 단풍이 어린다.
/영암=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道… 宿… 味
멀다. 승용차로 서울서 최소한 5시간 이상을 달려야 영암읍에 닿는다. 서해안고속도로로 목포까지 간 후 2번 국도로 영산호 하구둑을 건너면 영암이다. 호남고속도로 광산나들목에서 빠져 13번 국도를 따라가면 나주를 거쳐 영암에 이른다.
서울에서 영암까지 시외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뿐이기 때문에 5분마다 출발하는 광주행을 타고 광주에서 10분 간격으로 있는 영암행 버스로 갈아타는 게 좋다. 영암에서 산 입구인 천황사까지는 하루 5차례, 도갑사까지는 2차례씩 버스가 운행한다. 승용차를 천왕사에 두고 도갑사로 내려올 경우 도갑사 앞에 도열해 있는 택시를 타면 된다. 천황사 입구 주차장까지 1만5,000원 내외면 데려다 준다. 월출산관리사무소 본소 (061)473-5210, 도갑사무소 473-5111
월출산온천관광호텔(061-473-6311)이 이 지역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다. 호텔방에서 월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온천탕을 갖춰 인근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산행 후 피로를 풀기에 제격이다.
천황사 지구에는 신라모텔(473-7595)과 월출산모텔(473-7943), 도갑사 지구에는 월출산장(472-0405)이 있다. 각 등산로 입구 먹거리촌에서 민박을 친다.
영암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낙지. 특히 갈낙탕이 유명하다. 영암 갈낙탕은 전라도 한우의 갈비를 우려낸 국물을 뚝배기에 넣고 낙지를 끓여낸 것으로 영양탕을 대신할 정도의 건강식으로까지 평가받는다. 영암읍내의 동락식당(061-471-3388)이 가장 유명하다. 반찬으로 토하젓과 전어속젓을 내놓는다. 남도 젓갈의 백미다. 식당에서 젓갈을 팔기도 한다.
■오르는 길
월출산은 생김부터 독특하다. 주변 100리 반경이 평야인 곳에 홀로 우뚝 솟아있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풍화와 침식을 반복하면서 산의 모습을 갖췄다. 바위 봉우리의 모습이 울퉁불퉁 제멋대로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윤곽부터 심상치 않다. 그래서 덩치는 작지만 국립공원이다. 1988년 1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면적이 41.88㎢로 국내 국립공원 중 가장 작다.
신라시대에는 월라산, 고려시대에는 월생산이라고 불렀다. 수도권에서 멀어 산행을 '결행'하기가 쉽지 않다. 덕분에 가장 손때를 덜 탄 국립공원이다. 대부분의 등산로가 바위봉우리를 감돌며 이어지기 때문에 지리산 천왕봉에 버금가는 힘든 산행으로 꼽힌다.
등산코스는 크게 네 가지. 가장 일반적인 것은 월출산의 얼굴인 천황사에서 시작해 천황봉-구정봉-갈대밭을 거쳐 도갑사로 내려오는 종주 코스. 총 8.5㎞로 6∼7시간이 소요된다. 이 코스는 초입에서 구름다리-매봉-천황봉 코스와 바람폭포-천황봉 코스로 나뉜다. 시작부터 바윗길이기 때문에 초반 호흡조절이 필수. 구름다리 코스는 눈이 내리면 출입이 통제된다.
천황사에서 시작해 구름다리 코스로 천황봉에 올랐다가 바람폭포 쪽으로 다시 내려오는 코스는 5.8㎞로 약 4시간이면 가능하다. 천황봉에 올랐다가 강진군인 경포대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6.1㎞ 구간으로 약 5시간이 걸린다.
경포대에서 올라 도갑사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언덕을 피할 수 있는 코스. 7.8㎞ 구간에 5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월출산의 진면목을 맛보기에는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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