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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22)문명의 창시자들- ①수인(燧人) 신농(神農)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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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22)문명의 창시자들- ①수인(燧人) 신농(神農) 등

입력
2002.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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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원시시대에 인류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자연의 위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도 반영한다. 이 과정이 문명화이고 신화는 그것을 문명의 창시자들을 통해 표현한다.그렇다면 인류 문명의 첫 단계는 과연 무엇에 의해 이루어졌을까? 불의 발명이야말로 야만상태와 문명을 가름하는 첫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짐승과 다름없던 인류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얻음으로써 마침내는 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중국 신화에서는 불은 선물이 아니라 발명의 산물이다. 불의 발명자는 한둘이 아니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등 대신(大神)들이 저마다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처음 일으켰다는 신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불을 발명한 공로는 이들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이름 자체가 불을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는 수인(燧人)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수인은 어느 시절의 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백호통(白虎通)'이라는 책에 의하면 태고 적에 처음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했다 한다. 수인이 불을 발명하게 되기까지의 좀더 자세한 과정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초기에 지어진 소설 '습유기(拾遺記)'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수명국(燧明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사계절과 낮과 밤에 구분이 없었다. 이 나라에 수목(燧木)이라고 부르는, 불을 일으키는 나무가 있었는데 하염없이 넓게 가지가 뻗어 있었다. 그런데 올빼미 같이 생긴 새가 그 나무를 탁탁 쪼면 불이 일어났다. 총명한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 비벼대 보았다. 그랬더니 불이 일어났다. 이후 불을 발명한 그를 기려 사람들이 수인(燧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수인 신화는 원시 인류가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었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신화라기보다 생활기록 같다. 불의 발명으로 인류는 이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불의 발명 이후 인류가 이룩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업적은 농업의 발명이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해 매일매일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던 인류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경작을 통한 식량의 확보는 인류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의 산업혁명 못지 않게 원시 사회에 변혁을 초래한 이 현상을 두고 우리는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른다.

중국신화에서 농업의 발명과 관련된 신은 신농과 후직(后稷) 두 신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신농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백성들이 풀을 먹거나 물을 마시고 나무열매를 따 먹거나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에 질병이나 해독(害毒)이 많았다. 이 때 신농이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법과 어떤 땅이 농사짓기에 좋은지를 가르쳐 주었고 온갖 풀과 샘물의 맛을 보아 백성들이 선택할 것을 알려주었다.

신농은 이밖에도 따비 절구 등 농기구를 제작하고 농사를 위한 달력을 만들며 수리(水利)를 위해 우물을 파는 등 농업과 관련하여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남자'에서는 후직이 농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옛날에 밭이 마련되지 않아 백성들의 먹거리가 부족했다. 후직이 이에 땅을 개간하고 잡초를 가려내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어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후직은 농업을 위해 이렇게 힘을 다하다가 들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그가 묻힌 도광(都廣)이라는 들에서는 최상품의 벼 수수 기장 등 온갖 곡식들이 저절로 자라고 한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하니 죽은 후직의 혼이 여전히 농업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국가에서 농업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산업이었다. 후직의 후예인 주(周) 민족이 당시의 대국이었던 은(殷)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농업생산력 덕분이었다. 주 이후의 고대 국가는 농업을 중시하여 토지신인 사(社)와 농신인 후직을 함께 숭배하였는데 이후로 사직(社稷)은 국가의 운명과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사직의 신을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고 지금의 종로구 사직공원 안에 여전히 그 터가 남아 있다.

신농과 후직 외에도 그들의 후예 중에 농업의 발전과 관련된 신들이 있다. 가령 주(柱)는 신농의 아들로 추측되는데 그는 온갖 곡식 뿐만 아니라 채소를 기르는 데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하며 후직의 조카 혹은 손자라고도 하는 숙균(叔均)은 처음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숙균은 후일 밭의 신 곧 전신(田神)으로 추앙되었다.

농업 다음으로 인류가 발명한 산업으로는 어업과 목축업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물이다. 그물은 복희가 매듭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그의 신하인 봄의 신 구망(句芒)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또 어떤 현인이 거미줄을 보고 착상하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목축의 원조는 야생 코끼리를 길들였다는 순(舜)이다. 순이 묻힌 창오(蒼梧)의 들녘에서 코끼리가 순을 위해 밭을 간다는 신화는 이러한 신화를 암시한다. 순의 신하인 백익(伯益) 역시 야생동물을 잘 길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소를 길들인 인물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숙균과 은의 조상인 왕해(王亥)가 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산업은 잠업(蠶業)이다. 누에를 치는 일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비(妃)인 뇌조(□祖)가 처음 백성들에게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어 후세에 선잠(先蠶) 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잠총씨(蠶叢氏)라는 사람이 매년 초 백성들에게 황금빛의 누에를 한 마리씩 나누어 주고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간에는 잠업의 기원에 관한 슬픈 곡절을 지닌 신화가 전해내려 온다. '수신기(搜神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집에서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고 외동 딸과 숫말 한 필 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날 딸은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나머지 말에게 장난 삼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빠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내가 너한테 시집가줄텐데"라고. 말은 이 말을 듣자 고삐를 끊고 뛰어가 곧장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집을 향해 계속 울부짖어 댔다. 아버지는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급히 말을 타고 귀가하였다. 집에 온 후 기특한 짐승이라고 생각해서 평소보다도 꼴을 많이 주었으나 말은 먹으려 하지 않고 딸이 드나들 때마다 날뛰었다.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딸에게 까닭을 묻자 딸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화를 내고는 말을 활로 쏘아 죽이고 그 가죽을 뜰에 널어 말렸다. 아버지가 외출을 하자 딸은 이웃집 소녀와 뜰에서 놀다가 말가죽을 발로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짐승인 주제에 사람을 아내 삼으려고 해? 이렇게 껍질을 벗기운 것도 네가 자초한 일이야"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가죽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녀를 뚤뚤 말아 사라져버렸다. 이웃집 소녀가 놀라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일을 고하였다. 아버지가 딸의 행방을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큰 나무 위에서 딸과 말가죽이 모두 누에로 변해 실을 토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고치가 여느 고치보다 훨씬 크고 좋아 근처 마을 부녀자들이 누에를 가져다 길렀더니 수확이 몇 배는 되었다. 이후로 그 나무를 상(桑)이라고 불렀는데 상은 목숨을 잃었다는 상(喪)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 신화의 이면에는 고대인들이 누에와 말을 같은 종류로 인식했던 사유가 담겨 있다. 아울러 소녀의 죽음을 통해 잠마(蠶馬)신을 위한 희생제의의 흔적도 느껴진다. 누에를 치는 일은 머나먼 앙소(仰韶) 시기부터 시작되어 은 시대에는 이미 고도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은 시대에 뽕나무가 신성한 나무로 숭배된 것도 잠업의 흥성과 관련깊다. 이후 비단은 중국문화의 물질적 상징이 되어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중국과 서방세계를 잇는 교통로가 실크 로드(silk road)로 명명된 것만 보아도 비단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을 알 수 있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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