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이 2000년 6월 산업은행에서 빌린 4,000억원을 대출 승인이 이뤄진 당일 전액 인출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대북지원설'을 둘러싼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현대상선이 금융당국에 제출한 2000년 반기보고서에는 산업은행 차입금이 1,000억원으로 돼 있어 회계상 나머지 3,000억원의 행방이 신기루처럼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상선이 차입금 사용 내역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못한 채 계속 말을 바꿔온 데다 반기(半期)보고서에 기재된 대출약정한도액이나 상환일 역시 명백한 오기로 드러나 의혹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3,000억원 실제로 증발했나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3개월 만기의 4,000억원 일시 당좌대월(일종의 마이너스 대출) 승인을 받고 인출한 것은 2000년 6월 7일. 따라서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6월말까지의 재무상황이 반영되는 반기보고서에는 단기차입금을 4,000억원으로 기재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6월말 기준인 반기보고서(8월 작성)에 산업은행 차입금을 1,000억원으로 기재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현대상선측은 "반기결산 시점에는 1,000억만 사용했고, 나머지는 7∼8월에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문제는 현대상선이 6월 7일 대출당일 4,000억원을 일시에 인출한 사실이 확인된 이상 이 같은 해명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 더구나 실제 쓴 차입금 외에 반기보고서 상의 '대출약정한도'에서도 약 3,000억원의 공백이 생긴다. 현대상선이 2000년 반기보고서에 은행권의 대출약정한도로 기재한 금액은 4,415억원. 그러나 현대상선이 그 해 반기결산 전까지 은행권으로부터 받은 당좌대월 한도는 3월말 현재 전체 은행권 2,920억원을 비롯해 이후 외환은행 500억원(5월 18일) 산업은행 4,000억원(6월 7일) 등 총 7,420억원에 달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대출한도 역시 약 3,000억원을 누락시킨 것이다.
결국 문제의 3,000억원 공백을 메우기 위해 회계보고서 상 억지로 짜맞추기를 시도한 혐의가 짙다고 할 수 있다. 반기보고서 상 대출 상환일이 9월 28일(산업은행 주장)이 아닌 12월 29일로 잘못 기재된 점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현대상선이 '불순한 의도'로 분식회계를 했다고 단정짓기도 힘든 것이 현실. 일단 한도만 정해지면 차입자가 수시로 돈을 빼고 넣을 수 있는 당좌대월의 특성상 6월 7일 대출한도액이 모두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이후 해당계좌를 통한 입출금은 빈번하게 이뤄졌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잦은 입출금을 통해 6월말 반기결산 시점에 1,000억만 빠져나간 게 사실이라면 각종 의혹은 의외로 싱겁게 풀릴 공산도 크다.
산은 차입금 북한 전달설의 실체는
또한 대출 승인 당일에 인출이 이뤄졌다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이 자금이 대북지원을 목적으로 국정원에 전달됐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선 자금 인출 이후 현대상선의 일별 자금거래 내역을 일일이 파헤쳐야 하지만 현대상선이 공개를 꺼리고 있고, 산업은행 역시 금융실명제법 위반사항이라는 이유로 한 발 물러선 상태다. 이에 따라 관계당국의 계좌추적이 이뤄지지 않는 한 대북지원설은 계속 확대재생산 될 조짐이다.
물론 한나라당의 대북지원설에도 논리적 억측과 모순이 적지않다. 한나라당의 주장대로라면 현대상선은 비밀리에 북측에 전달할 자금을 굳이 추적당하기 쉬운 수표로 찾았고 은행권에선 가장 금리가 높은 일시 당좌대월을 통해 자금을 동원한 셈이다. 더구나 현대상선이 2000년 6월에만 현대건설의 유동성지원에 약 2,000억원을 투입했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서 비밀리에 수천억원을 빼돌릴 여력이 과연 있었는지도 아직은 의문이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회계 누락 맘먹으면 가능"/半期보고서 조회안해 제보없인 적발힘들어
현대상선이 4,000억원을 일시에 인출한 것으로 산업은행이 30일 인정, 거액의 대출금이 현대상선 회계장부에서 통째로 증발한 것이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이 같은 회계처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장부상으로는 어떻게 처리됐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4,000억원의 행방과 관련, 현대상선 반기보고서에는 산은 당좌대월 항목(꺼내 쓴 금액)에 1,000억원으로 기재돼 있고, 2000년 연간보고서에는 1,300억원으로 나와있다. 즉, 6월중에 1,000억원을 사용하고, 3,000억원은 하반기에 사용, 이중 2,700억원을 갚거나 일반대출로 전환하고 1,300억원을 못갚았다는 얘기다. 반기보고서의 주석 사항(기타 우발채무 관련)인 당좌대월 한도약정 금액에는 4,000억원이 누락돼 있는데 이는 회계작성상 의무사항은 아니며, 현대상선도 실수라고 인정했다.
이 같은 회계처리 과정은 현대상선의 해명과도 일치한다. 현대상선은 1,000억원을 6월에, 3,000억원을 7∼8월에 사용한뒤 9월28일에는 300억원을 갚고, 10월28일에는 1,400억원을 상환하는 동시에 1,000억원을 일반대출로 전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6월7일 4,000억원이 일시에 대출된 것이 사실로 확인된 이상 현대상선은 분식회계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상선 주장(9월28일 첫 상환)대로 6월에 한푼도 갚지 않았다면 반기보고서 당좌대월 항목을 4,000억원으로 기록했어야 한다.
이와 관련 회계전문가들은 "4,000억원을 회계장부에서 감추려 맘만 먹는다면 내부 제보가 아닌 이상 적발할 방법이 없다"는 분석. 연말보고서와 달리 반기보고서에 대해서는 회계법인이 금융기관에 얼마를 빌려썼는지를 조회하지 않을 뿐더러, 연간 조달자금이 수조원에 달하기 때문에 용도대로 자금이 집행됐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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