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1904∼1989) 화백의 1960년대 미공개 유작 120점이 12월 21일까지 서울 평창동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는 '60년대 이응노 추상화전, 묵(墨)과 색(色)'에서 소개되고 있다.고암의 작품세계는 일반적으로 70년대의 문자 시리즈, 80년대의 인간 시리즈로 대분된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되는 그의 60년대 작품들을 보면 풍경과 인간과 문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며 후일 그의 드넓은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공개작들은 대부분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소품이다. 낙관을 하면서 그 옆에 '시작(試作)'이라 적어놓은 것들도 여럿 눈에 띈다. 고암은 생전에 "작은 작품에는 대작이 가지고 있는 기(氣)와 운(運)이 충만해야 하며, 아무리 큰 작품이라도 허(虛)가 보이면 작은 작품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인 박인경씨의 회고에 의하면 고암은 늘 붓을 들고 자투리 시간에도 손에 잡히는 작은 종이 위에 작품을 완성하곤 했다. 소품의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한 순간도 소홀함이 없이 그때그때 작품을 일궈나간 그의 모습이다.
전시작들은 60년 1월 파리에 정착한 고암이 62년 첫 개인전을 열고 호평받은 이후, 6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작업한 추상화들이다. 고암은 한국에서는 이미 동양화단의 대가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56세의 늦은 나이에 새로운 예술의 모색을 위해 파리로 갔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자연에 바탕한 고암 동양화 특유의 정서가 논리와 이성에 바탕했으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추상과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글씨가 되고 글씨가 사람이 되고, 나무가 글씨가 되고 글씨가 나무가 되는 자유자재한 필치다.
특히 이번 전시는 고암이 사용했던 다양한 표현방법의 변화과정을 한 자리에서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먹물 혹은 채색이 묻은 헝겊을 종이 위에 찍고 그 위에 다시 붓으로 선과 점을 완성하는 기법, 기름 종이 위에 그리거나 화선지에 낸 먹물의 스며드는 효과, 종이를 찢어내리며 생긴 율동적 선을 그대로 살린 작품, 획(劃)의 짙고 옅음으로 사의(寫意)한 작품 등등이다.
먹이 투명하게 번져간 흔적만으로 형태를 요약하는 기법은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한 고암만의 개성적인 조형언어였다. 동양화 특유의 시적인 흥취와 한국적 정서가, 논리와 이성에 기반한 추상의 세계와 어우러진다.
"나는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소박, 깨끗하고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으로 나는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려 했다"는 생전 그의 말이 화폭의 크고 작음에 구애받지 않고 대범한 운필로 펼쳐나간 이번 작품들에서 느껴진다. 문의 (02)3217―5672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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