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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5)국민당 총재시절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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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5)국민당 총재시절⑨

입력
2002.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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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희망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각오였다. 기자회견 나흘 후인 1986년 12월10일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를 만났다. 이 총재는 뜬금없이 내각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나는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며 "내각제의 '내'자도 꺼내지 말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총재는 그때 이미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이 총재와의 회동 일주일 후인 12월17일 나는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고문을 남산의 외교구락부에서 만났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비서를 지낸 조승만(趙承萬)씨가 주선한 만남이었다.

당초 우리는 비밀리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당 간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김 고문도 수행자 없이 혼자서 약속 장소에 나왔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회동 사실이 일부 언론에 포착돼 현장에는 몇몇 기자들이 와 있었다.

이날 회동에서 두 사람은 개헌 문제를 원내에서 다룰 것과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합의했다. 김 고문은 "어떻게 해서든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해야 한다"며 "이 총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 또한 "직선제 개헌은 국민의 뜻인 만큼 함께 노력하자"고 협력을 약속했다.

아울러 나도 김 고문에게 부탁했다. "청와대 회담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제1 야당인 신민당에 총재가 따로 있고 실세가 따로 있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니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전면에 나서서 난국을 풀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 고문도 내 말에 수긍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전격 회동에 민정당과 당국은 크게 놀랐다. 이날 밤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노 대표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총재 이럴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나 역시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매몰차게 몰아 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나라를 구할 길은 직선제 밖에 없소."

이런 가운데 느닷없이 연말 정국을 '이민우 선언'이 강타했다. 12월24일 이 총재는 "정부 당국이 언론의 자유, 구속자 석방, 지방자치제 등 여러 민주화 조치를 단행한다면 내각제 개헌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름 전 그와 만났을 때 내각제에 대한 내 의견을 묻기는 했지만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 그 선언이 과연 양 김씨와 합의한 내용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이민우 선언은 이 총재의 단독 작품이었다. 신민당은 이 총재 비판으로 들끓었다. 국민 반응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 안팎의 압력에 시달린 이 총재는 며칠 후 온양에 내려가 있던 김영삼 고문을 찾아 갔다. 그러나 김 고문은 이 총재가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행을 떠나 버렸다. 이민우 구상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한 사람은 산으로, 한 사람은 온천으로'라는 말이 잠시 유행하기도 했다.

아무튼 연말 정국은 어수선하게 흘러갔다. 12월27일 3당 대표가 조촐한 송년 모임 형식으로 롯데호텔에서 만나 "내년 1월 중 공식 대표회담을 열고 임시국회를 소집해 계속 개헌 논의를 한다"는 간단한 합의문만 내놓았을 뿐이다.

87년 새해가 밝았다. 민정당은 합의 개헌에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신민당도 개헌 문제는 제쳐 둔 채 이민우 선언을 둘러싼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신민당 내분의 장기화는 당과 이 총재, 두 김씨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1월16일 우여곡절 끝에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이 회동했다. 이날 회동에서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았다. "이민우 선언은 직선제 개헌 관철의 한 방안"이라고 이 총재가 후퇴한 결과였다. 이로써 신민당은 다시 단합된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대는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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