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떻게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나와 같은 성향인 것으로 나옵니까."8월 말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한 회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외부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한 정 의원 지지도 조사 결과를 두고 열린 회의에 제출된 보고서는 국민들이 정 의원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보다는 노 후보와 비슷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 후보는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데 이럴 수가 있느냐"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토론이 길어 졌다. 결국 '국민은 정 의원이나 노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시대가 변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변화의 방향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임시 결론을 내고서야 회의가 끝났다. 이 회의를 계기로 노 후보는 정 의원의'재벌 2세' 이미지를 부각, 정책적 차이를 강조하게 된다.
"여론을 알아야 이긴다"는 상식은 우리 정계에서도 철칙으로 굳어졌다. 대선이 가까워 지면서 각 대선 주자 진영의 여론조사가 잦아지고 있다. 한나라당 이 후보와 민주당 노 후보는 거의 매주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받는다. 지지도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사 등의 여론조사와 달리 양당의 여론조사는 선거 전략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정쟁이 격화하면서 더러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이끌어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여론조사는 당의 정책 결정은 물론 후보의 동선과 발언, 심지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등에까지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한나라당은 여의도연구소가, 민주당은 정세분석국이 각각 자체 여론조사를 맡고 있다. 양쪽 다 거의 주 단위로 1,000∼3,000명을 표본으로 자동응답전화(ARS)를 이용해 조사에 나선다. 현안이 있을 때는 으레 긴급조사도 실시한다. ARS는 보통 오후 2∼8시에 실시하는데 응답률은 10% 안팎으로 저조한 편이다. 최근에는 ARS 조사와 함께 주요 쟁점에 대한 여론을 심층 분석하기 위한 포커스그룹인터뷰(FGI)도 자주 이뤄진다. 한나라당은 취약층인 20대만을 표본으로 한 개별면접조사 등 심층조사에도 공을 들인다.
민정당 때 만들어진 사회개발연구소에서 발전해 온 여의도연구소는 이 후보가 "조사 결과가 외부의 어느 기관보다도 정확하다"고 인정할 정도이다. 8·8 재보선 결과 등을 100% 맞췄다. ARS를 이용한 조사방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워낙 축적된 자료가 많고 분석 노하우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내세운다. 민주당 정세분석국의 당내 신뢰도는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유용한 정보 제공자로서 존중된다.
여의도연구소는 한나라당에서 유일하게 출입문에 '관계자외 출입금지' 표지가 붙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사 결과는 후보와 대표, 사무총장에게만 보고돼 최고위원들조차 귀동냥을 해서 정보를 얻었다. 선대위 출범 후에도 철통 보안이 계속되자 "도대체 어떻게 돌아 가는지 알아야 작전회의를 할 것 아니냐"는 최고위원과 대선기획단의 푸념이 무성해 보고 통로가 조금 넓어졌다.
그러나 보안에는 여전히 민감하다. 지난달 25일 고위선거대책회의에서 3자 대결에서도 이 후보 지지율이 정몽준 의원과 소수점 이하까지 똑 같은 것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한국일보에 보도된 후 정보 유출 경위 조사 등으로 야단법석이 났다. 한 당직자는 "얼마 전 대표와 총장에게만 보고된 '병풍논란으로 이 후보와 노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가 줄었다'는 조사 결과가 민주당에 알려져 병풍공세를 부추긴 일이 있었다"며 "기본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후보는 예민, 측근은 '심기경호'
대선 주자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한결같이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면서도 실제로는 누구보다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측근들은 지지도가 좋게 나온 외부기관의 조사 결과는 앞을 다투어 보고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이른바 '심기 경호' 때문에 서로 보고를 미룬다. 모 후보의 한 공보특보는 얼마 전 관례대로 모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미리 파악해 재빨리 보고했다가 기분이 상한 후보로부터 "그게 무슨 중요한 보고 사항이냐"며 질책만 받았다는 후문이다.
조사 결과는 후보의 움직임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이 후보가 최근 지방대학생들과의 청년실업토론회, 성균관대생들의 자취방 방문 등에 나섰던 것도 "서민 이미지 확보와 20대 공략이 매우 중요하다"는 조사 보고서가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이 후보가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정장보다는 캐주얼 차림을 즐기고, 측근들과 스킨십을 강화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깨끗한 정치는 기대할 만하나 포용력이 부족하고 딱딱하다"는 이미지 조사 결과에서 나왔다.
민주당 노 후보의 경우 최근 선대위에 당의 핵심인 동교동계를 철저히 배제한 채 개혁 색채의 인사를 전면 포진한 것도 각종 여론조사 결과 "노풍(盧風) 재점화를 위해서는 개혁색 강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수렴한 결과이다. 노 후보는 이에 앞서 노풍의 출발점인 여론을 거스르려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직후 "상도동 방문을 삼가라"는 여론 동향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도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만났다가 지지도가 급락하는 낭패를 당했다.
▶'정 의원은 공격하고 노 후보는 키우자'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추석 이후 정 의원 문제만 나오면 '정 의원= DJ 후계자'라는 주장을 편다. 안팎의 조사에서 정풍 견제가 시급하다는 보고와 함께 재벌 2세 이미지 보다는 현 정권과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게 효과적인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반면 노 후보에 대해서는 비난 논평을 거의 내지 않았다. 2자 구도보다는 3자 구도가 절대 유리하다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정 의원은 공격하고 노 후보는 은근히 키워 주는' 전략이 선 것이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이 두 번이나 총리임명동의안을 부결할 때도 최종 당론을 여론조사에 따라 결정했다. 장상(張裳) 전 총리서리의 경우 표결 직전 "첫 여성 총리 거부는 여성계의 큰 반발을 부를 것"이란 우려는 '찬성 31.8%, 반대 44.7%'란 긴급 여론조사결과에 따라 급속히 삭아 들어 부결쪽으로 당론이 잡혔다.
거꾸로 필요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를 이끌어 내는 예도 없지 않다. 8월 말 장대환(張大煥) 총리임명동의안 표결 직전 양당이 발표한 여론조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반대당론을 정한 한나라당은 반대(55.3%)가 찬성(25.3%)의 2배 이상인 조사 결과를, 민주당은 찬성(48.2%)이 반대(35%)를 크게 웃도는 결과를 각각 내놓고 당론을 뒷받침했다.
한나라당은 당시 도덕성 위반과 실정법 위반 등 장 서리에게 불리한 부분을 부각한 뒤 찬반 질문을 했고, 민주당은 총리 부재에 따른 공정공백 우려를 거론해 각각 입맛에 맞는 결과를 유도해 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