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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 특구/초대장관 양빈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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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 특구/초대장관 양빈은 누구인가

입력
2002.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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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 임명된 양빈(楊斌·39) 어우야(歐亞) 그룹 회장은 이제 북한에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다음으로 뉴스에 자주 등장할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를 평가하는 시각은 명암이 엇갈린다. 지난해부터 중국과 홍콩의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종합해 그의 라이프 스토리와 사업, 김 위원장과의 관계 등을 정리해 본다.

▶가난했던 성장기

양빈은 "가난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자신의 유년 시절을 술회했다. 1963년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의 극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때 고기는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1년에 학비 3위안과 교재비 2위안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배워야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나름의 진리를 터득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난징 대로변에서 큰 소리로 영어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쌓은 영어 실력은 해외 유학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 노력은 81년 랴오닝(遼寧)성 해군 2포병학원(대학)에 입학하면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85년 졸업 때 뛰어난 성적을 인정받아 조교수가 됐다. 전공했던 군사 전략학은 사업 성공에 큰 도움이 됐다.

▶네덜란드에서 사업 시작

86년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유학 기회를 얻으면서 그의 인생은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유학생활은 궁핍했다. 식당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라이덴 대학 시절 은사였던 미국 하버드 대학 정치학 교수 토니 사이크는 그를 "약삭빠른 수완가"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그는 89년 중국에서 발생한 6·4 천안문 사건을 잘 이용했다. 서방의 반 중국 분위기를 이용, 정치적 보호를 신청해 네덜란드 국적을 얻었다. 귀화 후에는 '해외 중국 민주화 운동가'를 자처하며 현지에서 교우관계를 넓혔다. 중국 민주화를 위한 해외 '민주연맹진지'네덜란드 지부 회장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곧 사업에 전념했다. 화훼 회사에서 1년 간 실습하면서 눈뜬 네덜란드의 '농업 기적'은 장차 농업 기업인으로서 그의 기초를 형성했다.

그는 90년 폴란드에 사상 처음으로 사영기업을 설립했다고 주장했다. 중계무역 2년 만에 끌어 모은 2,000만 달러는 사업의 종잣돈이 됐다. 93년 온실회사와 냉장회사 등 네덜란드 기업 두 개를 매입하면서 그의 어우야 그룹은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계 화교로 알려진 그의 부인과 두 자녀는 현재 네덜란드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에 돌아오다

94년 그는 모국에서 선진농업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중국에 입성했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 등 14개 대도시에서 차례로 대규모 화훼 전시회를 열어 중국을 놀라게 했다. 전통적인 농업 대국인 중국을 어떻게 네덜란드와 같은 선진 농업국가로 변신시킬 것인가가 그의 관심이었다. 중국에서 초기 그의 주력 업종은 화훼재배와 판매, 식품가공업이었다.

그가 중국 상륙 10년이 채 안돼 거부의 반열에 들게 된 비결은 뛰어난 인간관계 능력이 큰 힘이 됐다. 특히 그는 콴시(關係·비공식적 친분)가 치부와 직결되는 중국의 사업 환경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당 중앙 정치국 위원 리란칭(李嵐淸) 부총리등 중앙의 실력자들을 비롯해 차세대 유력자인 보시라이(薄熙來) 랴오닝성 성장 등과 친분을 맺어 나갔다. 지방 지도자들을 통해 중앙 실력자들과 선을 대는 점차적인 방법이 주효했다. 자본 유치에 관심이 큰 지방 지도자들에게 그는 '귀하신 몸'이었다.

그는 '돈과 권력의 교환(金權交換)'이나 중국판 정경유착인 '권력경제(權力經濟)'를 통해 저가 토지불하, 초저리 은행 융자를 얻어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내 기업보다 외자기업을 우대하는 중국의 정책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고 그는 부동산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초고속 성장을 했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선양에 "荷蘭村"건설 야심… 경영난說

중국의 두번째 부자로 알려진 양빈 회장은 구두와 넥타이 대신 운동화와 티셔츠를 즐겨 입을 만큼 검소하고 소탈해 보인다. 지독한 애연가이기도 한 楊 회장의 생활 방식과 경영 스타일은 그의 인생 역정만큼이나 유별나다.

그는 벤츠 시리즈 중 최고급 모델인 S-600 두 대와 최고가 차량인 롤스 로이스 두 대, 스포츠카인 노란색 페라리 한 대를 갖고 있다. 아시아월스트리트 저널은 그가 북한을 방문할 때는 개인전용 제트기로 평양 순안공항을 드나든다고 보도했다. 평양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서 그는 평양의 유일한 카지노 호텔인 양각도 호텔에 묵는 날이면 지하 카지노장에서 엄청난 액수의 베팅을 하는 통 큰 인물로 불리기도 한다.

楊 회장의 사업 방식 또한 기발한 발상과 과감한 추진력을 앞세우는 식이다. 그의 주된 사업기반은 화훼 분야이다. 어우야 그룹은 랴오닝(遼寧)성, 쓰촨(四川)성 등 8개 성에 종묘회사를 두고 있는 '어우야농예'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어우야실업과 와이즈캐피털 등 국내외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베이징(北京)에 전국 최대 화훼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어우야 그룹은 전국 각지 농업기지에서 연간 10억 위안(1,500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화훼사업에서 자신감을 얻은 楊 회장은 최근에는 부동산 종합개발사업에 한판 승부를 걸고 있다. 최대 야심작은 8억 5,000만 달러가 들어가게 될 랴오닝성 선양(瀋陽)시내 북쪽의 허란춘(荷蘭村) 건설사업. 말 그대로 132만평 부지에 올 연말까지 화훼단지와 테마파크 등을 갖춘 네덜란드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는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楊 회장의 행보는 7월부터 큰 난관에 직면해 있다. 7월 중국 언론들이 그의 토지 불법사용과 탈세 조사 소식을 보도하면서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는 어우야농예 주식은 폭락했다. 5월 주당 2.80홍콩달러를 기록하던 주가는 지난주 0.69홍콩달러로 곤두박질친 데 이어 불성실공시 혐의로 거래가 정지되기도 했다. 어우야농예가 어우야실업과의 내부거래를 그대로 매출로 잡는 수법으로 실적을 부풀렸다는 홍콩 소재 한 투자은행의 고발도 이어졌다. 헐값의 부지와 저리의 대출자금이 동원된 허란춘 사업이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사례라는 비난도 확산되고 있다. 2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楊 회장이 6월 현금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어우야 그룹 지분 절반을 담보로 내놓을 만큼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다고 보도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김정일, 첫 만남서 땅 45만평 내줘

홍콩의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1월 10일자)에 따르면 양빈 회장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2월 평양에서였다. 북한에서 화훼·카지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평양을 드나들던 楊 회장을 독대한 김 위원장은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부근에 있는 여의도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땅(45만평)을 선뜻 내놓았다. "농업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세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써 달라"는 것이 김 위원장의 당부였다.

이후 楊 회장의 모습은 김 위원장의 개혁·개방을 위한 대외활동 현장에서 자주 목격됐다. 한달 뒤인 2001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 지역의 발전상을 둘러보던 김 위원장은 楊 회장이 건설한 상하이 인근의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를 방문했다. 楊 회장은 올해 2월 김 위원장이 신의주를 현장 지도차 방문했을 때 또 다시 수행했다. 중국 소식통들은 이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두 사람이 '신의주 프로젝트'와 관련해 깊은 대화를 나눴을 것으로 보고 있다. 楊 회장에 대한 김 위원장의 신임은 각별하다. 4월 북한의 인민군 창건일 행사 때 楊 회장은 외빈들과 함께 특유의 검은 양복에 흰 양말 차림으로 군부대 퍼레이드를 지켜볼 정도의 입지를 굳혔다.

/김병주기자

● 양빈 약력

1963년: 중국 장쑤성 난징 출생

68년: 부모 사망, 할머니가 키우기 시작

81년: 랴오닝성 해군 2포병학원 입학

85년: 해군 2포병학원 졸업. 조교수 임용

86년: 네덜란드 유학. 화훼회사 1년 실습

87년: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입학

89년: 천안문 사태 후 네덜란드 귀화

90년: 라이덴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취득. 네덜란드서 의류판매업체 '유럽국제무역회사'설립

91년:폴란드 최초 사영기업 설립·등록

93년: 온실, 냉동회사 등 2개 네덜란드 기업 인수

94년: 네덜란드 어우야 회사 설립. 중국 진출. 중국 전역 14개 대도시 화훼 전시회 릴레이 개최. 선양, 다롄, 청뚜, 창춘 등에 온실·냉동회사 설립

98년: 어우야 농예 중국증시 상장. 랴오닝성에 허란춘 개발 시작

2001년: 어우야 농예 홍콩증시 상장. 포브스지 중국 내 2대 부호 및 전세계 200대 우량 중소기업 선정.

2002년: 중국언론이 '탈세혐의 조사 중' 보도(7월) 홍콩 증감원 어우야 농예 거래중단(9월 14∼25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 임명(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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