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 청와대 회담으로 대립 해소 전망이 밝아진 개헌 정국은 사흘 뒤 정반대 쪽으로 흘러 갔다. 5·3 인천 사태가 터진 것이다.1986년 5월3일은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경인지부 결성식 및 현판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대회장인 인천시민회관 주변에는 일찌감치 인파가 몰려 들었다. 운동권 학생이 주축인 이들은 정오께부터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시위대는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시위로 재야 및 운동권 단체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공안 당국은 5·3 인천 시위를 좌경 용공 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및 학생 운동권 세력을 떼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신민당의 개헌 서명운동 추진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른 재야 및 운동권은 당시 개헌을 위해 신민당과 한정적으로 제휴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민당의 개헌 서명운동도 벽에 부닥쳤다.
TV 뉴스에서 시위 장면을 지켜 보며 한꺼번에 몰려 드는 불안과 실망을 지울 길이 없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 이만 저만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설사 경찰의 발표대로 시위대가 용공 세력이라고 해도 그런 세력을 발생하게 한 책임은 정부에 있는 것 아닌가. 신민당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4·30 청와대 회담에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한 걸음 양보를 했으니 신민당도 일단 장외 투쟁을 멈추고 장내로 들어 오는 게 현명했다는 생각이었다.
5·3 사태로 정부 여당과 신민당의 대치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양측은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나는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양측을 동시에 비판했다. "양측 모두 무엇이 중요한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는 헌법특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정국 타개를 위해 5월29일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와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가 회동했고, 이어 30일에는 내가 노 대표와 만났다. 우리 두 사람은 6월 국회에서 헌법특위를 구성하고, 정기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등 6개항의 합의를 발표했다.
잇따른 대표회담으로 사전 정지작업이 끝나자 다시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이 열렸다. 6월4일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나는 헌법특위 문제부터 꺼냈다. "아집과 독선을 버려야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헌법특위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구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 여당이 타협 분위기 조성에 힘을 써 주셔야 합니다." 전 대통령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번만은 통일이 될 때까지 지속될 훌륭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나의 소신입니다.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절충해 빨리 개헌작업을 벌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얼른 '빨리'라는 말을 받았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부수 작업을 위한 일정을 감안할 때 금년 정기국회에서는 개헌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켜야 합니다만…." "여야가 합의한다면 올 정기국회에서도 통과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전 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 중 개헌을 언급했다. 비록 '여야가 합의를 한다면'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지만 커다란 진전이었다.
나는 학생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구속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이 총재께서 특별히 관심을 표명한 만큼 법 절차 진행 과정에서 본인이 뉘우치는 학생은 선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개헌 문제는 회담 말미에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개헌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며 다음 대통령은 반드시 새로운 헌법으로 뽑아야 합니다." "헌법이란 국가 운영의 기본이므로 소홀히 다뤄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정 정파나 특정 정치인을 위한 헌법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날도 느낀 것이지만 전 대통령은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 다수의 생각과는 달리 내심으로 내각제 개헌을 바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개헌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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