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귀향길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고향에 다녀왔다. 그렇게 고생스러운데도 다들 왜 고향에 가고 싶어할까? 아마도 이곳이 불편하고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낯설음, 혹은 무서움이라는 뜻의 독일어 Unheimlichkeit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우리의 귀향의식의 근원을 잘 보여준다. 명사 heim(집)과 부정접두사 Un(-아님)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 집이 아닌 곳에 있을 때 느끼는 기분이 바로 낯설음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낯선 기분이 우리를 자꾸 집으로, 고향으로 가게 한다.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사진)는 귀향의 철학자다. 1927년에 발표된 하이데거의 위대한 저작 '존재와 시간'은 현대인들이 지닌 고향상실의 아픔과 시대적 위기를 다룸으로써 오랫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우리에게 권유한다. 지금 네가 느끼는 낯섦은 진정한 자아의 상실을 알리는 신호음이다. 이 신호에 귀기울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물론 이것이 낙향에의 권유는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디에 있든 실향민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낯섦을 느낄 때 자기를 찾아나서는 대신 오히려 낯설음을 제거하려는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모방하는 세인(世人)적인 삶을 통해 낯설음을 제거하려는 현대인들의 시도를 비판한다.
현대인은 아무것도 혼자 결정하지 못한다. 무얼 먹고 무얼 입을까 무얼 읽을까 심지어 선거에서 누굴 찍을까조차도! 모든 것이 주간지나 여성지가 권하는 스타일에 따라 이루어지고 우리는 평균적인 삶을 통해 낯선 기분을 철저히 몰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잡지적 삶 속에서 '잡담' 혹은 '빈말'(Gerede)만이 늘어난다. 진정으로 결단하고 책임지지 않은 채 누군가를 모방하고 확대해서 떠드는 빈말들만이 웅웅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빈말들에 염증을 내며 문득 이곳이 내 존재의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낯선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불안(Angst)'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이 기분을 피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불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 즉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남들이 결정해주더라도 죽음만은 대신해줄 수 없다는 그 불편한 깨달음이 참나(眞我)를 찾고 매순간 결단하는 삶으로의 귀향을 종용하는 것이다.
잡담과 빈말의 시끄러움으로 진정한 나를 망각하는 대신, 자기의 고요한 소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책임감 있게 자신을 내던지는 것. 하이데거는 이것을 '죽음에의 선구(先驅)'라고 부른다. 모두가 죽음으로 앞서 달려나가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보라! 죽어가는 자는 어떤 빈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만을 선택하고 그 일에 자신의 전존재를 내던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결연하게 행동할 때만 현대적 삶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온갖 잡담들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스포츠 신문들의 스캔들, 온갖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잡담에 이르기까지 말들이 난무한다. 스타의 사생활 폭로 기사와 정치판의 뒷얘기만이 잡담은 아니다. 내년부터는 수해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겠다던 상습침수지역의 공무원의 약속, 이익의 일부를 사회로 환원하겠다던 기업인들의 약속,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정책을 입안하겠다던 정치인의 약속, 이처럼 책임지지 못한 채 내뱉어진 모든 말들은 다 잡담이다.
올 12월에는 대선이 있고 또 무수한 정치적 잡담들이 우리 곁에서 왕왕거릴 것이다. 누구보다 정치인들이 '죽음에의 선구'를 했으면 좋겠다. 유세장 앞에 선 그들이 단두대 앞에 선 것처럼 말했으면…. 국민들 앞에서 하는 단 한마디의 빈말에도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치며 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진은영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