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이 잔인한 사법살인

입력
2002.09.24 00:00
0 0

이른 아침, 이감(移監)을 핑계로 한 사람씩 끌려 나온 사형수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밤마다 집행의 악몽에 잠 설쳐야 했던 그들앞에 죽음의 현실이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리라 상상인들 했겠는가. 그것도 가뜩이나 이른 아침에. 그러나 교도관에 이끌린 발걸음이 이감과는 다른 길목으로 접어들면 이들은 대개 체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넥타이 공장(교수형 집행장)'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마치 어린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마실 때처럼 '하늘 한번 쳐다보고 땅을 한번 내려다 보는' 몸짓을 반복했다.민족일보사건으로 5·16후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던 양수정(민족일보 편집국장)은 오래 전 그의 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던 최인규 임화수 유지광 등 사형수들의 최후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의 책 제목도 사형수들의 이런 마지막 모습에서 인용하지 않았나 보인다.

인혁당 사건으로 죽어간 8명의 집행에 당시 군목으로 입회했던 박정일 목사의 최근 회고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박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75년 4월9일 새벽, 전격적으로 처형된 이들은 앞의 경우와는 달리 자신들이 왜 끌려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더러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여기가 어디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자신에게 닥친 이승의 마지막 순간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박정희는 긴급조치라는 비상수단으로 맞섰다. 이들 8명은 군사법정에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시나리오에 따라 민청학련의 배후조종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75년 4월8일 서슬 퍼런 유신정권의 대법원은 이들의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관행대로라면 이들에겐 적어도 몇 차례 재심신청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특히 생명형의 경우 오판의 가능성에 대비해 더욱 그렇다. 사형수라 하더라도 일단 재심을 신청하면 심리기간 동안은 집행이 연기된다. 대개 사형수들은 재심신청을 통해 한 동안이나마 사신(死神)을 밀쳐내려 발버둥친다. 그러나 강압체제유지에 혈안이 된 독재의 하수인들은 이들에게 부여된 최후의 방어권리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가 기각된 지 단 20시간 만에 유신정권은 '닭 모가지 비틀 듯' 이들 8명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갔다. 전시의 즉결처분을 제외하면 최단시간 내 처형 기록이 아닐까 싶다. 오죽했으면 당시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며 개탄했을까. 인간의 목숨을 잔인하게 유린한 유신정권도 '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고 했던 이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저주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인혁당 재건위'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밝혔다. 국가기관에 의한 명백한 범죄행위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재심의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리라 본다. 아울러 한평생 빨갱이 가족으로 억울하게 살아온 유족들에게도 정부가 물질적 배상으로 다소나마 위로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문사 규명위에 따르면 중정은 혐의를 부인하자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자행했다. 물고문 받은 인사 가운데는 폐농양증으로 피를 쏟았고, 병사한 사람도 있다. 고문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격 파탄자들은 고문을 통해 이렇게 멋대로 범죄를 조작했다.

아직도 유신은 불가피한 시대상황이었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살인적 고문행위도 불가피했다는 것일까. 이들을 범죄자로 만든 당시의 중정 간부도, 더구나 고문수사의 당사자인 이 모라는 사람도 지금 활보하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마저 청산 못하는 국민에게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역사의 법정에 시효따위가 무슨 장애물이냐고 반문할 때다.

노진환 주필 jhr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