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월 중국 상하이(上海) 푸둥(浦東) 지구를 둘러본 뒤 밝힌 '천지개벽'의 개혁이 압록강 변 신의주에서 처음 가시화하고 있다. 북한이 22일 공개한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은 57년간 견고하게 유지돼온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개방과 변혁의 격랑을 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날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된 '특구 기본법' 조문들은 북한이 개혁·개방의 의지 뿐 아니라 체제 내에 자본주의 도입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제한적 시장경제 실험
북한의 시도는 물론 경제·식량난, 산업구조 왜곡, 계획경제 마비 등으로 표출된 체제의 모순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다. 신의주 특구는 1970년대말 중국이 외부 자금·기술 도입 및 경제회생을 위해 시도했던 제한적 자본주의 실험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북한은 대외개방에 대비해 7월 임금과 물가를 인상하고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 등 대내적인 충격완화를 도모했다. 또 경제협력을 복원하기 위해 대남관계를 정상화했고 50억∼100억 달러의 식민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북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북한은 이 같은 조치가 '사회주의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중국 베트남 등의 예처럼 종국적으로는 점진적인 체제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홍콩 따라 배우기
특구법에는 1991년 라선(나진·선봉) 무역 특구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배어있다. 국제적 금융 무역 상업 공업 첨단과학 오락 관광지구로 조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101개 조항에 담고 있는 특구법의 하이라이트는 특구에 입법·행정·사법권을 부여한 것이다.
상지대 서동만(徐東晩) 교수는 "입법회의와 장관직을 두도록 한 것으로 미뤄 북한이 중국 내 홍콩 관계와 같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신의주 특구가 겉으로는 자율권을 부여 받았으나 본격적인 자본주의를 도입할 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일국양제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외자유치가 관건
특구법이 특구 내에 국적·민족별 차이를 없애고 토지 임대기간을 향후 50년으로 못박은 것은 외자 유치를 목표로 한 대목이다. 결국 특구의 성패는 외국기업의 투자에 달려있다. 이와 관련, 김용술 북한 무역성 부상은 지난달 "외국기업의 투자지분율을 70∼80%로 확대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북한은 이를 위해 특구 내에서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행정·금융제도, 기업 구조 등을 국제규범에 맞게 조정하는 등 추가적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석(李鍾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제개혁의 경험이 일천한 북한이 오랜 준비 끝에 모험적으로 자본주의 실험을 시작했다"면서 "특구 성공의 관건은 자본주의 지역과 경쟁할 수 있는 값싼 노동력 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별도 區章·區旗 "국가속의 국가"
북한이 선포한 신의주 특구는 토지사용권 및 입법 행정 사법권을 보유, 독립적인 주권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북한이라는 국가 속의 '신의주'라는 또다른 '작은 국가'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중국 속에 이질적 사회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홍콩처럼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사회 속에서 신의주는 자본주의체제를 실험하는 독립적인 지역이 된 것이다.
중앙정부와 별도로 입법회의를 설치, 특구 필요에 따른 입법이 가능하고 특구의 북한주민은 물론이고 특구의 주민권을 가진 다른 나라 사람도 입법회의 의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특구 주민의 의무와 권리 조항에서 "정견, 신앙에 따라 주민은 차별당하지 않는다"고 규정, 북한 사회를 옥죄어온 주체사상의 획일적 틀에서 벗어난 것으로까지 해석된다.
또 이번 신의주 특구기본법은 국가가 위임한 범위에서 특구 명의로 대외사업을 하고, 여권을 따로 발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외교권의 일부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다 구장, 구기를 특구의 자체 결정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특구가 외형적으로 국가의 모습을 띨 수 있는 요소를 갖췄다. 중앙정부와의 연계는 신의주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지는 '장관'이지만 장관의 자격도 '특구 주민으로 사업능력이 있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은자'로 규정, 현지인 임명 가능성을 열어놓아 자율성을 배가했다.
이러한 법적 규정은 일국양제 하에서 홍콩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홍콩은 별도의 의회를 가지고 있고 중국과는 별개로 영사업무를 할 뿐 아니라 별도의 깃발을 가지고 있고 경찰권과 국방권만 중국의 본국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
김연철(金鍊鐵)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조치는 신의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교 자본을 감안해 북한 영토 내에 중국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파악된다"며 "중국 초기 개방 과정에 비해 훨씬 급진적인 조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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