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까지 경평친선축구대회로 맥을 잇던 남북의 체육교류는 분단 이후 40년이 넘도록 중단돼왔다. 제3국에서 열린 각종 국제대회의 남북대결이 교류의 전부였다.분단 이후 남북교류의 물꼬가 트인 것은 1990년 10월11일(평양 5·1 경기장)과 23일(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두 차례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였다.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대회기간이던 9월28일 남북의 수석대표가 현지에서 합의해 성사된 통일축구대회는 분단국가의 체육교류라는 상징성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통일축구의 열기는 이듬해 4월 세계탁구선수권과 6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역사적인 남북단일팀인 '코리아팀'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단일팀 구성 이후 남북의 스포츠교류는 김일성 주석 사망(94년) 등 북측의 정세 급변으로 90년 내내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남측의 민주노총과 북측의 조선직업총동맹은 99년 8월 평양에서 2차례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치르며 교류의 활성화를 예고했다. 그해 열린 남북통일농구대회 역시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따라 (주)현대 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개최한 행사였다. 현대 남녀농구단과 북한의 우뢰(남), 회오리팀(여)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친선전을 벌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의 남북 동시입장은 국제 스포츠사에 기록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남북의 대표팀은 대형 한반도기 1개를 앞세우고 주경기장에 입장,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7일에 열린 남북통일축구도 한일월드컵 이후 남북스포츠교류의 순풍을 알리는 행사였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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