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가졌으니 기업과 정치 가운데 하나는 버려야할 텐데요." 지난달 16일 지리산 화엄사. 주지인 명섭(明燮) 스님이 정몽준(鄭夢準) 의원에게 덕담을 하다가 은근히 현대와의 단절을 주문했다. 정 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회사 일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왔다"고 대답했다.정 의원이 넘어야 할 산은 무엇보다 재벌의 대권 도전을 둘러싼 정당성 논란이다. 그는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로 전체 주식의 11%인 836만주(시가총액 18일 종가 기준 1,572억원)를 갖고 있다. 또 현대의 중립성 확보 조치를 해야 하고 정책 검증의 관문도 통과해야 한다.
▶재벌의 대권 도전 논란
정 의원의 출마는 정치권 뿐 아니라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도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동시에 추구해도 되냐"는 논란을 부르고 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인 한성대 김상조(金尙祚·경제학) 교수는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갖는다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면서 "정 의원이 집권할 경우 다른 재벌의 우려도 있고 노동자들과의 협조가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민병균(閔丙均) 자유기업원장은 "정 의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재벌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며 "기존 정치의 효율성에 대한 불신이 높은 만큼 기업인의 출마는 새 정치의 출발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당수 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중립적으로 시장을 관리하는 역할을 해야 하므로 대기업 소유주가 직접 정권을 잡는 것은 문제"라면서 정경유착을 우려한다. 하지만 정 의원은 "권력이 부패하지 않으면 정경유착이 있을 수 없다"면서 "내가 당선되면 대기업들이 돈을 가져올 분위기가 아닐 것"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로마시대 귀족의 아들인 줄리어스 시저는 민중파에 참여했고, 존 F 케네디는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며 '부자의 진보성'을 거론하고 있다.
▶현대와의 관계 정리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에서 현대그룹의 조직과 자금을 끌어들여 물의를 빚었다. 정 의원은 '선거법 준수'와 현대를 대선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7일 출마 선언 때는 "출마 및 공직 임기 동안 내가 소유한 현대중공업 주식 전량을 금융기관에 신탁하고 그 기간에 발생하는 자본 차익 전액을 자선기관에 기부하도록 하겠다"면서 현대중공업 고문직 사퇴 의사도 밝혔다.
하지만 자본차익의 자선단체 기부 공약이 실천될 수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자본차익'은 이자 및 배당수입(Income Gain)이 아니라 자본이득(Capital Gain)을 의미하므로 실제로 주식 매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자선단체에 기부할 게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정 의원측은 "수탁 은행과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본이득을 낼 수 있도록 구체적 내용을 담으면 된다"고 말했다.
또 "지분 매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최대주주의 간접적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라며 신탁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정 의원은 "지분이 처분되는 경우 경영권이 허공에 뜰 가능성이 있으며 증시에 미칠 영향도 우려된다"며 신탁 방식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참여연대는 "현대중공업 지분을 신탁하겠다는 말은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지위를 병행하겠다는 것"이라고 소유 지분의 처분을 촉구했다.
▶정책 및 국정운영 능력 검증
첨예한 현안에 대한 정 의원의 입장은 여전히 모호하다. 최근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선 공무원 노조의 단체행동권 요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므로 다른 회원국들이 공무원에게 행동권을 주는지 참고해야 한다"는 말로 빠져나갔다.
단기필마로 출마 선언을 한 그가 정책 분야의 준비가 덜 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0쪽 분량의 '주요정책 방향'이란 자료집을 배포했지만 그 안에도 정책의 뼈대만 들어있을 뿐이다.
그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슈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정 의원은 이제 계층, 지역, 세대 간에 이해가 엇갈리는 정책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정 의원은 "자문 교수를 비롯한 정책 지원을 할 사람이 600여명에 이른다"며 "신당 창당에 맞춰 각 분야 정책을 다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 경영과 스포츠 외교 경험은 거쳤지만 행정 경험은 사실상 전무하다. 민자당 정책조정실 부실장과 국민당 정책위부의장을 지냈지만 주요 당직을 맡은 적도 거의 없다. 따라서 그의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검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체육인 MJ
"회장님, 망신만 당합니다."축구 관계자들은 1993년 12월 정몽준 의원의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출마선언을 극구 반대했다. 이듬해 5월로 다가온 선거는 일본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정 의원은 "월드컵 유치와 FIFA 부회장 가운데 어느 게 쉽냐"고 되물었다. "후자"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그럼 쉬운 것부터 하겠다"며 논란을 잠재웠다.
96년 5월 정 의원은 월드컵 유치마저 성공해 축구계가 불가능한 일로 여겼던 두 가지를 모두 이뤄냈다.
체육인 정몽준의 화려한 성공은 강한 추진력과 카리스마 등 그의 장점을 한껏 부각시켰다. 하지만 시작은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의 덕이 컸다. 대한축구협회장 당선은 정 명예회장이 김우중(金宇中) 전임 회장을 찾아가 부탁한 결과라는 게 정설이다.
수많은 공적 뒤에 구설수도 따라다닌다. 일부 축구인은 "현대 맨들이 장악한 협회는 사조직"이라며 "4강 타령만 하는 독선적 협회와 담쌓은 지 오래"라고 말한다. FIFA를 흉내내 협회 재정을 철저하게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방식도 간혹 도마 위에 오른다. 정 의원의 해외 출장과 거스 히딩크 전 감독 영입 비용 등은 "한 사람만 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베일에 가려 있다. 축구협회장과 FIFA 부회장직을 유지하느냐는 문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정 의원은 "공명선거에 부담이 된다면 사퇴를 고려하겠지만 국민 이해를 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이준택기자 nag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