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역사적인 방북은 도착부터 출국까지 약 11시간 동안 마지막 순간을 빼고는 시종 실무적이고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2000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 영접도, 뜨거운 포옹도, 승용차 동승도, 수십만 군중도 볼 수 없었다.이번 방북을 실무방문으로 규정하고 회담 성패에 정치생명을 건 고이즈미 총리는 국내의 여론을 의식한 듯 끝까지 단호하고 경직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북한측도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의 따뜻한 공항영접이나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상회담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는 오전 11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3시 34분까지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오후 회담은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끝났다. 첫 회담에서는 외교 관례에서 벗어난 파격이 있었다. 통상 정상회담에는 양측 참석자 수를 맞추는 게 관행인데 북한측은 김 위원장, 강석주(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 통역 등 3명이 참석한 반면, 일본측은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신조(安培晋三) 관방부장관, 외무성의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외무심의관,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아시아·대양주국장, 총리의 비서관, 통역 등 북한의 두 배인 6명이 참석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북한측의 배석자가 사실상 강 부상 1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오전 회담에서 북측으로부터 납치 일본인 현황을 전해 듣고 "일본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충격을 받았다"고 강하게 언성을 높이며 항의했다고 다나카 히토시(田中均)일본 외무성 아주국장이 전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오후 회담에서 "조사를 진행했고 내부조사를 했다. 납치문제의 배경에는 수십 년의 양국의 적대관계가 있었다곤 하지만 매우 좋지 못한 일이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김 위원장은 시종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으며 솔직한 표정이었다고 다나카 국장은 말했다.
회담장 고이즈미 총리는 회담장인 백화원 영빈관에 오전 11시 직전에 도착, 김 위원장을 기다렸다. 그의 얼굴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카키색 점퍼 차림으로 나타난 김 위원장은 다가와 악수하면서 "반갑습니다"라고 먼저 말을 건넸고, 고이즈미 총리는 "초대해 줘서 감사합니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다른 정상들과의 만남 때처럼 포옹을 하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 역시 그의 습관인 두 손을 맞잡는 악수 대신 오른손만으로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어 아베 관방부장관 등 수행원들을 김 위원장에게 소개했고 김 위원장은 이들과 간단히 악수했다. 분위기는 다소 딱딱했고 양측 모두 긴장된 표정이었다.
이어 김 위원장은 "들어갑시다"라며 고이즈미 총리를 회담장소로 안내했고 가는 도중 고이즈미 총리가 복도의 꽃을 보면서 "꽃이 아름답습니다"고 한마디 했을 뿐 별다른 대화 없이 회담장으로 이동했다.
양 정상은 오전 회담 후 오찬을 같이 하지 않고 별도로 했는데 이는 일본측이 '실무방문'에 무게를 둔 데다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내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됐다.
▶도착 및 환영
오전 9시 6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고이즈미 총리는 전용기 트랩을 천천히 내려와 영접나온 김영남(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악수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항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권력서열 2위인 김 상임위원장은 웃음을 띤 얼굴이었으나 고이즈미 총리는 굳은 표정이었다.
김 상임위원장은 "먼 길 잘 오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고, 고이즈미 총리는 "좋은 날씨입니다"라고 답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어 김일철(金鎰哲) 국방위 부위원장 등 다른 영접인사와 간단한 악수를 나눈 뒤 아무런 환영행사 없이 승용차 편으로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향했다.
이날 평양시내는 평상시와 다름 없는 조용한 모습이었다. 통상 외국 정상이 방문할 경우 걸리는 국기도 보이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1면 톱으로 보도했던 노동신문은 고이즈미의 방문기사를 1면 오른쪽 하단 구석에 3단 크기로 실었다.
/평양=공동취재단
도쿄=신윤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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