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 시냇물. 이따금 양양 비행장을 향하는 비행기 소리가 전부였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윤환)의 촬영현장은 강원 영월에서 비포장도로로 1시간 정도를 굽이굽이 들어가야 나타나는 태백산 중턱 폐광지대. 승합차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길가에는 벌개미취, 구절초, 쑥부쟁이 같은 국화과 자매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비밀리에 외계인을 납치해 지구수호작전을 펴기에는 제격인 곳이었다."이번 개기월식 때 안드로메다에서 왕자가 올 거야. 강 사장(백윤식)은 로얄 유전자코드를 가진 유일한 놈이지. 저 놈부터 잡아야 해. 이대로 두었다간 엄청난 재앙이 올 거야." '지구를 지켜라'는 5년째 병으로 누워있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네킹 가내 수공업과 양봉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 병구(신하균)가 외계인의 지구파괴 음모가 있다고 확신하고, 한 기업주를 납치한다는 황당한 내용의 영화다.
13일 촬영은 강 사장을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는 병구와 그를 뒤쫓는 추 형사(이재용)가 맞닥뜨리는 대목. 병구는 "길을 잃었는데 하룻밤 묵을 수 있냐"고 눙을 치다가 정체가 탄로 난 추 형사의 얼굴에 꿀 세례를 퍼부어 벌이 공격하게 한다. 영화로야 2분이 채 안 되는 장면이지만, 장윤환(32) 감독은 꼼꼼히 모니터를 하면서 신하균 이재용 두 배우와 상의해 다시 찍기를 반복했다. 벌을 얼굴에 묻힌 채 연기하던 이재용은 벌침에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대사와 설정은 코미디지만, 스릴러와 SF 등 여러 장르를 뒤범벅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첫 장편영화를 맡은 영화아카데미(11기)출신의 장 감독은 "영화 선배들의 작품에 대한 패러디이자, 오마주(homage·숭배)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납치대목은 영화 '미저리', 동춘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병구의 애인 순이(황정민)는 '길'의 젤소미나, 순이가 병구를 구하는 대목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따왔다. '외계인을 첩첩산중 외딴 곳으로 납치한다'는 아이디어를 굴리다, 인터넷에서 '디 카프리오가 모든 여자들을 홀려서 지구를 정복하려는 외계인'이라는 얘기를 읽고 "옳지"하며 무릎을 쳤다. '지구를 지켜라'는 1억2,000만원을 들인 영월의 판자집과 양봉장 세트를 주무대로 10월 말 촬영을 끝내고 내년 설 연휴에 개봉한다.
/영월=이종도기자 ecri@hk.co.kr
■주인공 신하균/"진지한 코미디 기대하세요"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한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그 외계인을 납치까지 해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만장일치로 신하균이라고 했다." 제작사인 싸이더스 측의 얘기다. 신하균(29·사진)도 이심전심.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신선해요."
신하균은 'JSA' '킬러들의 수다' '복수는 나의 것' '묻지마 패밀리' 등에서 진지함과 코미디를 한데 갖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선보였다. "병구하고 저하고 비슷한 면이 있어요. 혼자서 뭔가에 몰두하는 성격도 그렇고. 밝은 성격보다 어둡고 상처받은 역을 좋아해요."
듣고 보니 해맑은 눈빛 속에 그늘이 드리워있는 듯하다. 신하균은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SF와 스릴러 그리고 코미디가 뒤섞였거든요." 무엇보다 병구의 캐릭터가 복합적인 까닭에, 모험과 스릴을 느낀다고 했다. "잠깐 사이에 분노와 기쁨, 슬픔 사이를 오가야 하니까 어렵죠. 이런 성격에 현실감을 주려면 또 나름대로 일관된 성격이 있어야 하니까 두 배로 어려워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현장에 있을 때도 리듬을 타면서 응집된 에너지를 분출시키려고 하죠."
그렇다면, 감독이 보는 배우 신하균은? "눈빛이 좋잖아요. 시나리오 완성 단계부터 러브 콜을 계속 보냈어요. 잔 재주보다는 순수하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어요. 맥도 잘 잡아내요. '오버'할 때는 오버하고, 깊이 들어가야 할 때는 한 없이 깊이 들어가고." 장윤환 감독은 옆에 있는 신하균을 가리키며 농담 한 마디를 보탰다. "코미디 감각도 뛰어나죠. 그런데 그걸 잘 모르더라구요. 자기가 진지한 배우인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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