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미국 뉴욕에서는 1년전 있었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추모식이 열렸다. 전 세계인이 '9·11 테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전대미문의 반인륜적 범죄의 현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당시 사건은 한국시간으로 밤 10시를 전후해 발생했고, 각 신문사에는 퇴근했던 기자들이 속속 편집국으로 불려나와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뉴욕의 무역센터에 비행기가 돌진한 사진을 커다랗게 실은 신문이 각 가정에 배달됐다.■ 그러나 '9월11일'은 이 사건 말고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 날이기도 하다. 바로 2001년 9월11일자로 발행된 한국일보의 사회면에 'G&G그룹 이용호 회장, 작년 수사하다 무혐의 처분' 기사가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이 기사가 10개월 뒤 대통령의 둘째 아들까지 구속시킨, 소위 '이용호 게이트'의 출발이었다.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가 1972년 6월17일 5명의 절도범 기사에서 비롯됐듯이, 우리의 '게이트'도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었던 한 주가조작범에 대한 수사에서 시작됐다.
■ '광주 출신의 유망한 청년사업가'로만 알려졌던 이용호씨가 주가조작 등 혐의로 대검 중앙수사부에 구속된 것이 9월4일이었다. 다음날 "이씨 뒤에는 어마어마한 백이 있어 작년에 특수부에 잡혀갔다가도 살아남았다"는 제보가 한국일보에 들어왔다. 사건기자들이 모두 취재에 들어갔고 5일 동안의 맹렬한 취재결과 한국판 '딥 스로트'(Deep Throat : 워터게이트 사건에서의 제보자)의 말은 상당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 '9·11 테러' 관련기사로 거의 모든 신문지면을 메우다시피 했을 때도, 다른 신문들이 애써 '이용호 게이트'를 외면하고 있을 때도, 한국일보는 꾸준히 속보를 냈다. 결국 본보의 보도로 인해 대검 특별감찰본부가 만들어졌으나, 미온적 수사자세가 문제돼 급기야 특별검사가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아들과 처조카, 검찰총장의 동생 등이 관련된 비리 스캔들은 이렇게 햇빛을 보게 됐다. 9월11일을 맞아 "사건기자여, 영원하라"고 말하고 싶다.
/신재민 논설위원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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