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양군 서면 수상리의 농민 이모(53)씨는 몇대째 지켜온 고향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널뛰는 농작물 가격에, 밀려드는 수입농산물로 마음고생이 심할 때도 '그래도 믿을 건 땅 뿐'이라며 굳게 지켜온 전답이었다. 하지만 태풍 '루사'는 애써 지켜온 신념마저 산산이 부숴 놓았다. "어떻게 지켜온 고향인데…. 하지만 여기선 더 이상 살아갈 길이 없다고 결론내렸습니다."▶다시 농사지으려면 3∼5년
태풍 '루사'가 어렵게 버텨온 농민들을 대규모 탈농(脫農)으로 몰아가고 있다. 침수 정도면 한해 농사를 손해보면 되지만 이번 태풍은 수십년의 피땀이 밴 옥토를 한 순간에 쓸모없는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관련기사 29·31면
폭우로 유실·매몰된 농경지는 강원도에서만 9,378㏊(2,800만평). 표토(表土)가 휩쓸려 내려간 전답 위엔 자갈만 굴러다녀 현재로서는 농지로서의 가치가 전무한 상태다. 객토(客土)작업으로 지력을 회복하는 데만 수년은 족히 걸린다. 이 뿐이 아니다. 유실제방과 농수로도 재축조해야 하지만 강원도에만 파괴된 수리시설이 940곳이나 돼 완전복구까지는 부지하세월이다. 강원도 관계자는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와 봐야 겠지만 농사가 가능하려면 최소한 3∼5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만 해도 농민들이 버티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실제로 강원 고성군 토성면, 양양군 서면 등 동해안 북쪽의 대표적 논농사 지역 주민들은 벌써부터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경북 김천시 자례면, 부항면 등도 술렁대고 있다. 자식들을 도시로 내보내고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고향을 지키던 촌로들 중 상당수는 이미 자식들 손에 이끌려 고향을 등졌다. 2일에는 강원 정선읍 북실리에서 농민 유모(47)씨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하는 일도 빚어졌다.
▶농지 복구때까지 생계 막막
피해지역 지자체들은 대규모 탈농사태를 막기위해 백방으로 방안을 강구하고 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강원도 등은 농사를 다시 지을 수 있을 때까지 정부에 생계비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지만 이것으로는 입에 풀칠도 힘들다. 그나마 지금은 매주 일인당 응급구호비 1만7,360원이 전부. 농지복구비용이야 정부지원과 융자를 기다려본다 해도 당장의 생계대책은 전무하다.
강원 정선군 임계면 도전2리 안교원(62)씨는 "밭 7,000여평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생계와 자식교육을 생각하면 캄캄하다"며 울먹였다. 6년 만에 귀향의 꿈을 접고 다시 도시행을 결심한 김천시 부항면 지좌리 박광재(35)씨는 "하늘마저 농민을 도와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고개를 떨궜다.
/정선=곽영승기자 yskwak@hk.co.kr 김천=전준호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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