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이헌우(李憲雨·76)씨는 정년 이후 서울외국인학교에서 바이올린 강사로 일하고 있다. 교수 재직 당시부터 정치학 못지않게 바이올린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자신이 창립한 한국 재능개발연구회의 명예 회장직도 맡아 영재교육법의 일종인 '스즈키바이올린 교수법' 전파자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바이올린과 나와의 인연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내게는 정치학, 그리고 대학교수직이 오히려 '외도' 였다. 교수직을 그만둔 지금에야 난 좋아하는 바이올린에 몰두하며 빡빡하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사범학교에 다니던 12세 때였다. 1학년 첫 음악시간, 최종휘 선생님이 들려준 바이올린 소리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고 선생님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레슨비 같은 것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저 배우겠다는 학생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도 고마워서인지 선생님은 나를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몇 년 전 93세로 돌아가신 최 선생님은 이후에도 옆집에 살며 나와 꾸준한 인연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때에는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음악인을 '딴따라'라 부르며 천시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악단 같은 것도 제대로 없어 음악을 직업으로 삼았다가는 그야말로 '굶어죽기 딱 좋을' 때였다. 고민 끝에 나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고, 유학 후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비교정치와 정치사상을 강의했다. 하지만 언제든 바이올린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내 꿈이자 위안이었다.
재직 시절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전기를 만들어준 사람을 만났다. 당시 청주에서 피부과 의사로 일하던 안휘모씨가 바로 그이다. 나는 그의 아들에게 틈틈이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일본에서 특이한 바이올린 교육법이 널리 퍼지고 있다"며 한번 가볼 것을 권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스즈키 바이올린의 창시자 스즈키 신이치(鈴木鎭一) 선생의 바이올린 교육법은 마치 어린아이가 글을 배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무작정 악보를 보는 대신 3세 이전의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많이 들려주며 바이올린 소리를 체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바이올린은 입시의 수단도, 문화적인 허영도 아닌 하나의 생활이다. 자연스럽게 주의력과 집중력을 길러주고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1년 동안 선생님께 교육법을 사사했으며 이듬해 한국에 와서 이 교육법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한국재능개발연구회를 창립했다. 이때가 1970년이었다.
바이올린과 전혀 상관없는 정치학 교수직을 병행하기는 물론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 시작한 것은 끝을 보아야 하는 성미이기에 둘 다 끈을 놓지 않았다. 정치학 교수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 왜 이상한가. 감히 내 자신을 그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어딜 가든 바이올린을 갖고 다닐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나는 주로 강의가 없는 주말에 바이올린 연주와 협회 활동에 매달렸다. 아이들에게 스즈키 교육법을 스스로 실험하기도 했다. 지금 금융계와 무역회사 등에 종사하고 있는 세 아들은 모두 음악을 즐길 줄 안다. 명절같이 온 가족이 모일 때에는 조촐하게 가족음악회도 열곤 한다.
당시 국가적으로 교수들에게 '학문의 영역 내에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지침이 장려되고 있었다. 공대 교수라면 생산 현장에서, 농학 교수라면 너른 들에서 국가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입밖에 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내가 전공한 정치학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스즈키 바이올린 교육법이야말로 내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정년 이후의 시간은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진정한 황금기다. 나는 지금 서울외국인학교에서 미국, 중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의 아이들을 하루 네 시간씩, 일주일에 나흘간 가르치며 음악교사들에게 교육법을 전파하는 일도 한다. 때로는 기운이 부치다가도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만 생각하면 절로 기운이 난다. 강의가 없을 때는 하루 세 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사전을 편다. 그러다 보니 너무 바쁘다. 내가 사는 곳(서울시니어스타워)에서는 산책이나 영화 등 입주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 대신 음악감상시간에는 빠지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CD나 DVD도 많이 대여해주기도 했다.
내가 스즈키 바이올린을 접한 때가 43세. 자연스럽게 제 2의 삶으로 정년을 준비하게 된 셈이다. 좋아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고 있으니 난 참 운이 좋다. 노년을 대비하시는 분이라면 현재의 취미생활을 좀더 규모있게 꾸려보실 것을 권한다. 무료한 노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현역 때보다 더 활기찬 사회생활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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