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 때문일까. 우여곡절 끝에 13일 개봉하는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성소)' 앞에서도 장선우(50) 감독은 소년처럼 밝은 웃음을 보인다. 사상 최대 제작비(총 110억원), 최장 촬영기간과 후반작업(총 20개월)이란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들, 그 때문에 투자사와 갈등이 빚어졌고 소문도 흉흉했다. 나름대로 자기 변명에 급급하거나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는 '구업(口業)'이란 말을 꺼냈다. "대부분 낭설이거나 엄청난 과장과 음해들이다. 입으로 짓는 죄(업)를 어찌할꼬. 인과응보라고 했는데…. 세상풍파에 무심할 수 있는 마음을 다스려야지. 그게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이거든."
■장선우는 불교철학적인 감독?
그는 '성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라는 금강경의 한 구절도 언급했다. '성소'의 세계관이자, 감독 자신의 세계관이라고 했다. 참 묘한 사람이다.
모두가 "장선우가 폐기처분했다"고 믿는 1993년의 영화 '화엄경'속의 불교 철학적 메시지가 9년 뒤에, 그것도 10대를 위한 철저한 오락게임 액션영화 '성소'에 다시 나타나다니.
기획부터 완성까지 꼬박 3년을 매달렸다. 반도 못 찍었는데 처음 예상한 제작비 35억원이 다 날아갔다. 감독도 처음이라 대형 액션과 게임처럼 보여야 하는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고, 게임처럼 늘 업그레이드할 생각으로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완결해 놓지 않고 시작했다. "카오스(Chaos)야말로 에너지일지 모르는데 닫고 갈 수는 없었다."
갈수록 아이디어가 늘어났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일주일 예상한 촬영이 한 달이나 걸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건 아닌지' 두려운 투자자로서는 당연히 제동을 걸었다. 감독이 "못하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일주일 동안 잠적한 것도 그때였다.
"결과적으로 잘했다. 영화 속에 장풍(에너지)이 보인다. 그것에 관객이 맞을 수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히 중국집 배달원 주(김현성)의 '성소 구하기' 게임을 신나게 즐기고만 나가더라도."
■장선우는 선정주의자?
이 시대에 무슨 성냥팔이 소녀인가. 소녀는 성냥 대신 '라이터 사세요'하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떠돈다.
동화 속의 쓰러진 소녀는 꿈속에서나마 행복을 느끼지만, '성소'의 소녀는 라이터의 가스를 마시고 환상에 빠져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가 된다. 야릇한 복고풍, 동화적 인물과 첨단 오락 게임의 결합. 게다가 신비의 CF 소녀 임은경의 첫 영화 출연작이다.
역시 영리한 상업주의 감독인가. 특히 성(性)을 소재로 이 시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데는 그를 따를 감독이 없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꽃잎'(1996년) '나쁜 영화'(1997년) '거짓말'(1999년)이 그랬다. "센세이셔널리즘? 천만에. 그 시대의 화두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은 독재의 억압이 풀린 시대의 성도덕 문제이다. 선정적이라는 비판은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 '화엄경'도 '경마장 가는 길'(1991)의 냉정한 극사실주의로 풀지 못한 실존문제에 불교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지금도 그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성소'는? 게임 열풍과 정보 홍수인 우리 시대를 반영한다. 아이디어는 한 영화잡지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에서 따왔다. "IMF 직후, 한 겨울에 서울서 라이터를 팔다 얼어죽는 소녀에 대한 묘사. 굉장한 시각적 자극이었다. 그 소녀를 현실이 아닌 게임 속에 집어넣는다면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1차적인 목적은 재미이다. 재미는 게임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는 게임을 통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장자의 '나비꿈'을 연상시키는 나비, 게임의 시스템과 실제 힘의 원천으로 등장시킨 바닷물, 멀티 엔딩(두 개의 결말) 구조로 간 것도 다 이 때문이다. "
■장선우는 왜 자꾸 어려질까?
"재미있으니까. 어른들 얘기는 재미없다. 그들이 훨씬 민감하게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본다. 세대 차이, 감각의 차이가 있다는 단정은 어른들의 무관심에서 나온다. 애들과 놀아보면 안다. 오히려 30대보다 10대가 편하다. 그들은 어떤 잣대를 갖고 있지 않다. 나도 잣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때론 장난스럽다. '성소'에서도 시작부터 '목포의 눈물'노래가 나오는가 하면, 무성영화시대의 변사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또한 편견이다. 모든 사물을 한 측면만 보지 마라.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거룩함이 있으면 야비함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워낙 대작(제작비가 많다는 뜻)이라 흥행부담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관객과 '폭발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주의 보석을 다 채워주는 것보다 금강경 몇 마디 주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는 뻔뻔한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자신감의 표현일테지만.
/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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