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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7)8,9대 원외시절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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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7)8,9대 원외시절 ③

입력
2002.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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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외 생활은 참 고달팠다. 명색이 집권 여당의 정책위 상근 부의장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햇볕이 들지 않는 골방 하나 뿐이었다.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시 공화당의 재정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당의 재정위원회도 없어졌다. 모든 정치자금은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했다. 길전식(吉典植) 사무총장이 매달 한번 청와대에 가서 운영비를 받아 당을 꾸려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당 운영에 쓸 돈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한테 직접 받았지만 나중에는 비서실장으로 운영비 수수 창구가 격하됐다. 그만큼 당의 위상도 따라 내려갔다. 아무튼 당시는 모든 것이 청와대 비서실과 행정부 우선이었고 당은 뒷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책 결정도 절차에서부터 왜곡됐다. 행정부는 정책 입안과정에서 당과 사전 협의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에게 미리 결재를 받은 뒤 나중에 통고만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여당이 해야 할 일, 정책위 부의장으로서 할 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예산 심의와 정책 입안 과정에서 행정부와 종종 마찰을 빚었다. 행정부와 싸우면 싸울수록 나는 원외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원외의 서글픔은 나의 재기 의지를 더욱 굳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나는 북아현동 집에서 연세대 근처의 봉원사까지 산책을 했는데 그 길목에서 멀리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졌다. "만일 다음 번에도 공천을 받지 못하면 무소속으로라도 반드시 출마하리라. 단 하루를 하고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저 의사당 안에 들어가 할 얘기를 다할 것이다."

유신은 그 폭압성에 비례해 야당과 재야 인사의 반발과 항거를 불러 일으켰다. 1973년에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8월8일은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당 간부로부터 납치사건을 전해들은 나는 공화당 당사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끝장이구나. 민심도 천심도 모두 공화당과 박 대통령을 떠나겠구나." 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신은 무조건적 추종 세력만 만들었고, 이들의 충성 경쟁이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불러 일으켰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 납치 사건에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지만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나는 윤석헌(尹錫憲) 당시 외무장관 대리가 결재를 받으러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창가에서 혼잣말로 "쓸데없이 사건을 일으켜 나를 괴롭히다니…"라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를 나중에 그로부터 직접 전해들었다.

아무튼 김대중 납치사건은 유신 이후 억눌려 있던 학생들의 반 정부 욕구를 폭발시켰다. 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유신 반대 데모를 필두로 해서 촉발된 학생 시위는 12월초까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 데모는 또 각계의 저항으로도 번졌다. 12월13일 윤보선(尹潽善) 백낙준(白樂濬) 김수환(金壽煥) 등 사회 지도층 인사 13명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건의서'가 나왔고, 12월24일에는 장준하(張俊河) 백기완(白基玩)씨 등 재야 인사 30여명이 중심이 돼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74년 들어 개헌 요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정부는 1월8일자로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했다. 이후 폭압적 정권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는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팽팽한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민주화 세력은 온 몸으로 독재에 저항했고 정권은 이들을 힘으로 눌렀다. 그 와중에 국가적 불행도 있었다. 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에 피격해 숨졌다.

1971년부터 시작된 8년 가까운 나의 원외 시절은 말 그대로 격랑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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