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적인 10월 유신 선포는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쉽지 않게 시작한 나의 정치 인생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런 폭압적인 헌법 아래서 어떤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가 밀려 왔다.고민은 한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내 나이 마흔이었다. 다시 신문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도 결코 여의치 않았다. 여기서 정치를 접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공화당을 떠나느냐, 남느냐였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의도 하고,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지금에서야 변명같긴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누군가 공화당에서 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고 여겼고, 내가 그 역할을 하리라 마음 먹었다. 여당으로 들어 왔다가 야당으로 가는 것도 그리 탐탁치 않았다.
당시의 내 선택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는 제 각각일 것이다. 30년이 흘러 나의 이력서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조차 그 선택이 과연 옳았느냐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미국 시인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처럼 두 갈래 길을 모두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1972년 12월23일 유신헌법에 의한 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입후보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에서 2,359표 중 무효 2표를 뺀 2,357표를 얻어 당선됐다.
국회가 해산했으니 이듬해에 국회의원 선거를 다시 해야만 했다. 뜻하지 않게 재기의 기회가 빨리 온 셈이다. 어렵게 당 잔류를 결정한 나는 망설임 없이 공천을 신청했다. "지난 번 선거 때 이후락(李厚洛)의 방해 때문에 떨어졌지만 이제는 3선 개헌 반대로 인한 보복은 끝난 게 아닌가"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공천 결과는 뜻밖이었다. 내 이름이 없었다. 공천이 확정되면 내게 미리 연락해주기로 했던 김진만(金振晩) 재정위원장도 떨어졌다. 김 의원은 공천 탈락 사실에 충격을 받아 몸져누울 정도였다.
2월27일 9대 총선이 끝난 뒤 3월7일 있은 대통령 추천의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도 나는 빠졌다. 김진만 의원은 구제됐다. 나는 솔직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유정회 국회의원은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천에서 탈락한 것은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다시 공화당 탈당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대통령이 정말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 하는구나. 이제 떠날 때가 된 모양이구나."
나는 차라리 공부를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특파원 경험도 있고 해서 다소 익숙한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도쿄(東京)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모든 수속 절차를 밟았다.
떠나기 전 나는 박 대통령에게 출국인사는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 마지막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내가 직접 편지를 전하기도 뭣해서 나는 당시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에게 부탁했다. 윤 소장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였지만 대구중학을 다닐 때 육상 선수로 활약, 대륜중 농구선수였던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윤 장군은 내 편지를 청와대 정보수석비서관인 김시진(金始眞) 장군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얼마가 지난 뒤 출국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이효상(李孝祥) 의장이 전화를 했다. 박 대통령을 만났더니 내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이 의장은 "밖에 나가게 하지 말고 당에 붙들어 놓아 일을 하도록 해 달라고 박 대통령이 당부했다"며 당 정책위 상근 부의장직을 맡겼다.
나는 중학교 은사이기도 한 이 의장의 만류에 결국 유학의 뜻을 접었다. 그 때 정책위의장은 박준규(朴浚圭)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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