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니 참으로 난감했다. 한동안은 심란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 시절 대구 달성공원과 모교인 연세대 뒷동산을 자주 찾았다. 대학 졸업 후 기자생활과 국회의원 생활을 하는 동안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내 모습을 돌이켜 봤다. 그리고는 "오히려 잘됐다. 나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자. 이게 약이 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흔들리는 마음을 어느정도 추스른 뒤 나는 정치권으로 눈을 돌렸다. 비록 원외였지만 정치와 담을 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정치를 하려고 맘먹은 이상 이런 식으로 정치판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 해(1971년) 10월 공화당에서는 '10·2 항명 파동'이 일어났다. 선거 후 김종필(金鍾泌)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취임한 오치성(吳致成)씨는 취임하자마자 그 동안 김종필 총리와 반대편에 서 있던 김성곤(金成坤) 길재호(吉在號) 백남억(白南檍) 김진만(金振晩) 씨등 이른바 4인 체제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오 장관은 4인 체제 계열의 도지사 군수 시장 및 경찰 간부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정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4인 체제 쪽에서는 내심 불안해 하면서도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 야당이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해임안 표결에서 야당에 동조했다. 여당이 다수 의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해임안은 가 107표, 부 90표, 무효 8표로 통과됐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에게 반란 책임자를 색출해 자백을 받아내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국에 끌려간 의원들은 무자비한 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김성곤 의원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까지 뽑히는 수모를 당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이 때였다.
이 사건으로 김성곤 길재호 의원은 당에서 제명당하면서 의원직을 잃었고, 김진만씨는 모든 당직에서 물러났다. 4인 체제가 완전히 몰락한 것인데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박 대통령은 나를 포함한 3선 개헌 반대파를 8대 선거를 전후해 솎아낸 데 이어 3선 개헌과 대선 이후 공로자로 부상한 새로운 세력마저 제거한 것이다.
정부 여당 내에 완벽한 추종 세력만 남겨놓은 박 대통령은 1년 뒤인 72년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1972년 10월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 중 일부 조항의 효력을 2개월간 중단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헌정을 중단시킨 것이다.
박 대통령은 비상계엄 하에서 초 스피드로 헌법을 완전히 뜯어고쳐 나갔다. 중앙정보부가 중심이 돼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추진돼 왔던 개헌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 대통령 임기 6년에 중임제한 철폐, 대통령의 국회의원 3분의1 지명권,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등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은 열흘 만에 만들어졌다. 당시 윤주영(尹胄榮) 문공부장관은 10월27일 새 헌법안을 공고하면서 10·17 특별선언을 '10월 유신'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유신헌법은 한 달 여 뒤인 11월21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91.5%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10월 유신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유신 헌법은 법률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장기집권을 위한 악법임에 틀림 없었다.
"이제 공화당은 어디로 가는가? 박 대통령의 집권욕이 자신의 순수했던 구국 의지와 지금까지의 업적마저 무너뜨리고 말겠구나…." 나는 갈림길에 섰다. 공화당을 떠나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아예 정치를 그만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