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지(延吉)시에 사는 조선족 이모씨(37)는 한국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이씨 부부는 1994년 친척 방문 형식으로 한국에 갔다. 돈고생 몸고생 5년 끝에 꽤나 큰 돈을 모아 경기도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고 딸까지 낳았다. 그러다 이씨 혼자 2000년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중국으로 추방됐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1년만에 부인이 아파트를 팔고 한국 사람과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이 보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부인에 대한 증오심에 술을 많이 마셔 위암까지 얻었다. 가족도 건강도 잃은 이씨는 한국이 싫다.
조선족들에게 한국행은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한국행이 급증하면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되는가 하면 교육기반이 취약해지는 등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
조선족들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이제 92년 한·중 수교 초기의 혈연적인 민족감정 단계에서 이해와 갈등기를 거쳐 교류와 협력의 경제적 관계로 정립된 느낌이다.
옌볜(延邊) 한국투자기업협회 윤국원(尹國源) 회장은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한국에 대한 악감정은 98년을 전후해 한국 정부가 피해동포 구제사업을 하면서 많이 해소됐다고 지적했다.
조선족 송호경씨는 "한국으로 취업하러 가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옌볜 현지 한국인 브로커들에게 돈만 뜯기고 못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원망이 많았다"며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 도착한 뒤에 각종 비용을 송금하는 식으로 관행이 바뀌어 한국인에 대한 욕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2000년 옌볜대학 동북아국제정치연구소가 조선족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조선족들의 한국관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설문에 대해 13%가 '매우 좋다', 49.3%가 '대체로 좋다', 29%가 '그저 그렇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나쁘거나 매우 나쁘다'고 부정적인 답을 한 사람은 5.6%에 불과했다.
한국의 좋은 점으로는 40.3%가 '발전상'을, 10.7%가 '잘 사는 것'을 이유로 꼽았고 33.7%는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질서가 좋아서'라고 답했다. 한국이 나쁜 인상을 주는 이유로는 '못 사는 사람 천지'(41%), '너무 힘들게 살아서'(13%), '심한 이기주의'(21.7%) 등을 꼽았다.
한국인의 나쁜 면은 '제 잘난 체 뽐내기를 좋아한다'(32.3%), '신용이 없고 거짓말을 한다'(20.3%), '조선족을 차별한다'(8.3%) 등으로 답해 한국인에 대한 불만의 원인이 인격적 측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0년대 말 조선족 시각에서 쓴 한국·한국인 비판서 '한국은 없다'(김재국 저),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김문학·김명학 공저)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의 추한 모습과 조선족을 멸시하는 행태에 관해 쓴 두 책이 인기를 얻은 것은 한국인을 싫어하는 조선족들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다. 옌볜 신화서점 관계자는 "지금은 이런 류의 책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옌볜에서는 '돌아오는 고향 만들기' 운동이 일어나고 동북 3성 조선족 청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족 집중촌 건설' '조선족 인터넷 사이트 개설' 움직임이 활발하다.
중국 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 정신철 연구원은 "고향에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누구도 고향을 등지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 건설을 위해 경제를 살리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은 고국이다. 이제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한국과 조선족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이용하고 당하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경험을 공유하는 호혜관계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옌볜대학 조선·한국문제연구소 고경수 연구원은 "남한과 북한이 반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동포는 통일을 위한 중개·조정자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칭화(淸華)대 쩡런지아(鄭仁甲) 교수는 "조선족도 한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고 참된 중국인으로 살면서 산업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조선족 사회도 행정공동체에서 문화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옌지·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 고향 돌아온 A씨의 고민
옌지(延吉)시에 사는 조선족 A씨는 4년 전 한국행에 성공, 3년 여 불법 체류를 하고 돌아온 지 8개월 됐다. 당시 수속비로 6만 위안(1,000만 원)이 들었는데 올해는 7만5,000위안으로 올랐다. 여기에 이자로 월 3∼5%가 붙는다. A씨는 중국 내 수속비로 2만 위안, 한국에서 초청장, 서류 등을 보내오는 데 2만 위안, 비자를 내는 데 2만 위안, 기타 잡비 등을 썼다. 한국에 간 지 6개 월만에 부인도 따라 나와 지금도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A씨는 3년 동안 빚을 갚고 20만 위안을 벌어 귀국했다. 옌지에서 ㎡당 1,400위안 하는 100㎡ (약 30평)짜리 아파트를 사는 데 15만 위안 정도가 들었다. 장식을 하는 데도 2만5,000위안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하고 돈 쓰는 걸 범보다 무서워하면서 모은 돈"을 모두 썼다.
A씨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조금 더 벌어 택시를 한 대 장만하든지 아예 2,3년 더 버텨 식당이나 노래방, 다방을 할 수 있는 ㎡당 2,500∼3,000위안짜리 영업집을 샀더라면 하는 마음에서다.
A씨는 같이 한국에 갔다가 돌아와 시골에서 정미소와 자가용 영업으로 돈을 번 친구 B씨가 부럽다. 일을 하려 해도 한 달에 기껏 800∼900위안밖에 못 받으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A씨는 최근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했다. 옌볜(延邊)에서는 한국에 나갔다 온 사람 치고 큰 돈을 모은 사람이 없다. 고향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 돈도 많이 모으고 재산도 크게 늘었다.
■150년 조선족 정체성 최대위기
중국 내 조선족 사회에는 '민족 단결을 내 눈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은 150년 이민사에서 가장 큰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위기는 극심한 인구 이동과 도시화, 인구증가율 격감, 민족 교육 축소, 가정파괴 등으로 나타나면서 조선족 사회의 기반인 촌락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의식을 약화시키고 있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기 전 조선족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하에서 농촌에 집단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며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확대로 시장경제 체제가 강화되자 전통문화가 와해되면서 문화파탄론, 동화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91년 중국 내 조선족은 192만 명이었다. 지난해 비공식 통계는 20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족의 마음의 고향인 옌볜(延邊)은 50년대에 옌볜 조선족 자치주 전체 인구의 70%이던 조선족 비율이 현재 38% 정도로 줄었다. 10∼20년 후에는 20% 정도로 떨어져 자치주 자체가 유명무실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처럼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중국 각지로 진출하기 때문이다. 특히 88 서울올림픽 이후 몰아친 한국행 열풍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현재 한국에 체류 중인 조선족은 무려 14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법무부가 실시한 불법체류자 자진 신고 때 신고한 조선족 수만 9만1,736명이었다.
조선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 농촌 지역에 있는 4,000∼5,000개의 조선족 자치마을은 절반 가량이 황폐화했다. 자치마을 주변에 있던 조선족 학교도 문을 닫고 교사들은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은 멀리 떨어진 한족 학교로 전학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농촌에는 노인과 노총각들만 많고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그쳤다. 20∼30대 여성들은 모두 도시로,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동북 3성 조선족 사회에서는 집집마다 4촌 이내의 친척 가운데 한국에 갔거나 다녀오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 때문에 부부가 장기간 떨어져 살다 보니 가장파탄이 잦다. 열 가정 중 절반 가량이 이혼을 한다. 또 미안한 마음에 자녀에게 용돈을 많이 주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타락하는 경우도 많다.
/송대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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