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통화 가치 강세로 유가 상승 여파를 실감하지 못했지만 유가가 상승세를 이어갈 경우 실질적인 경제 타격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부동산 시장 열기와 수해 등의 요인으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수준이다."(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한국은 주택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 오름세가 지속되고 있어 인플레 우려가 커지고 있다." (JP모건) 물가가 하반기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올해 3% 이내에서 물가를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던 정부도 국제 원유가 상승과 태풍 '루사'의 파괴력에 휘청이며 물가에 대한 예의 주시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맞물려 콜금리 조기 인상론도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는 미국 경제의 더블딥(이중침체) 우려로 그동안 '성장'쪽에 맞춰졌던 거시경제 중심축이 '물가' 쪽으로 옮겨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가 왜 뛰나
통계청 조사에서 2개월 연속 하락세를 보였던 소비자물가는 8월 들어 전달에 비해 0.7%,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서는 2.4%가 각각 올라 올들어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집중호우로 인한 채소, 과일 등 농수산물 가격 앙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9월 이후에는 인플레 압력이 전방위에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커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태풍 '루사'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뒤 농수산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명절 수요까지 겹쳐 최악의 '추석 물가난'이 불가피하다. 잇단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값 상승세는 좀처럼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가정용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대(對) 이라크 공격 가능성과 함께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는 이보다 더 심각하다. 물가 통계에는 전세·월세 가격을 제외한 부동산 매매 가격은 자산가치의 변동이라는 이유로 포함되지 않고 있기 때문. 실제 8월 부동산 가격 폭등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 통계에서는 전·월세 가격의 상대적 안정으로 집세가 0.3%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물가가 진짜 관건
8월까지 누적 물가 상승률이 2.5%로 아직까지 올해 물가 목표(3% 내외)에는 다소간 여유가 있는 편. 전문가들이 "문제는 올해가 아니라 내년"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범식(金凡植) 수석연구원은 "상반기에 비해 하반기에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 목표치를 소폭 상회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며 "관건은 물가 상승이 단기간에 그치지 않고 내년까지 지속되느냐 여부"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내년에 경기 회복세가 본격화하면서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의 인플레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 여기에 가뜩이나 시중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연말 대통령선거로 풀린 돈이 내년 상반기에 시차를 두고 물가에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버스, 지하철 요금 등 내년으로 미뤄진 공공요금 인상도 잇따를 예정이어서 내년까지 집값이나 원유가격 등이 안정세를 찾지 못할 경우 최악의 인플레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해법은 있나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돈을 줄이는 것이 '경제의 ABC'다. 하지만 실제 정책은 그리 간단치 않다. 미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은 시점에서 섣불리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가 세계경제가 동반 침체에 빠질 경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자칫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이 부동산 과열을 막기 위해 금리 정책을 동원할 움직임을 보이는데 반해, 정부가 "실물경제 회복세가 둔화하는 마당에 금리 인상은 적절치 못하다" 며 반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당장은 부동산 대책, 추석 성수품 공급 확대 등 미시적 대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금리를 포함한 통화·재정 정책을 신축적으로 운용한다는 원칙 아래 일단은 미시적 접근을 할 수밖에 없다"며 "원유가도 두바이유 기준으로 26달러선을 보이고 있는 만큼 30달러를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아직까지는 큰 문제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인플레 왜 나쁜가/부동산 소유자만 "떼돈"
물가가 오르면 일정한 액수의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실질소득이 감소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소비생활은 그만큼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봉급이나 연금 생활자 같이 수입이 고정돼있는 서민들은 살림이 어려워지는 반면 토지나 건물 등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은 부동산가격 상승으로 이익을 누리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버는 부동산 갑부들을 바라보며,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은 갈수록 감퇴된다.
인플레가 지속될 때 현금을 갖고 있으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동산 등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미리 투자하려 하기 때문에 저축은 감소한다. 저축이 줄면 금융기관은 대출재원 확보를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이는 기업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 자금 여유가 있는 기업도 설비투자를 하기 보다는 당장 돈이 불어나는 부동산에 투자, 생산능력과 일자리가 줄어들게 된다. 국민경제의 체질이 그만큼 악화하는 것이다. 박 승(朴 昇) 한국은행 총재는 3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아은행가협회(ABA) 연차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인플레 하에서는 금융거래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실물자산 투자 등 인플레 방어적인 자원배분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는 또 소득 분배에 악영향을 미친다. 물가가 오르면 예금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물가가 오른 만큼 금융자산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므로 손해를 보는 반면 채무자는 갚아야 할 부담이 줄기 때문에 이익을 보게 된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도움말:한국은행>도움말:한국은행>
■80년대후반 vs 현상황 비교/부동산, 인플레 주범 "닮은꼴"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가장 심각한 인플레를 겪었던 80년대 후반 '3저(低) 호황기'와 지금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
우선 경제상황을 살펴보면 80년대 후반엔 지금(성장률 6%대)보다 경기가 훨씬 좋은 가운데(성장률 9∼11%대), 부동산 매매가격과 전세가격(88년 기준)이 각각 15.5%, 22.2% 오르며 물가상승을 주도했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6월말 현재 전년대비 17%대의 상승률을 기록하며 물가의 복병으로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통화증가율(M2기준)도 87∼88년 18.8%, 90년 21.2% 등으로 나타났고 현재 역시 6월 13.8%, 7월 12.6%로 매우 높은 편이다. 환율의 경우 80년대 후반이나 최근에 인플레를 진정시키는 원화 강세기조를 나타내고 있다. 원화 절상률은 88년 12.6%, 89년 8.8%에 달했고 현재(2일 기준)는 9.2%를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물가 영향력이 큰 부동산 가격, 환율, 통화량 등이 모두 80년대 후반과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당시와는 경제체질, 수입개방도 등 제반 여건이 달라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게 한국은행의 분석이다. 과거엔 국산품 가격이 오르면 물가상승으로 직결됐으나 현재는 사실상 모든 제품이 수입되고 있어 물가상승의 파급 경로가 달라진 것이다. 특히 정보기술(IT)의 발달, 할인점 등 신 유통망의 등장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인플레 압력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80년대 후반 당국은 토지공개념 도입(89년 12월), 주택 200만호 공급(88년 5월) 등 부동산정책차원에서 극약처방을 내놓았으나 유동성(돈) 흡수,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의 대응강도가 미약해 인플레를 꺾는데 4∼5년 이상 걸렸다. 따라서 90년 후반부터 경기가 꺾이고 이후 시장의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주목할만한 점은 80년대 후반과 마찬가지로 현재도 인플레의 주범인 부동산가격 거품이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올들어 7월까지 부동산가격이 20.9% 올랐고, 호주와 캐나다·스페인은 10%이상, 미국은 7%나 뛰었다. 경제가 개방되면서 세계 동조화 현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어, 어떤 식의 대응이 효과적인 인플레 해열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남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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