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리공업(주)에서 28년간 직장생활을 마치고 54세에 정년을 맞은 이재근(李在根·60)씨는 경기도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전통 장을 만들어 파는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품에 살면서 전통 입맛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1996년 30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전원 생활을 시작했다. 큰 딸을 출가시킨 후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직장을 그만 두기에는 젊은 나이였던 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귀농(歸農)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당시 난 심한 고혈압과 관절염 수술로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한 상태였다. 또 도시에 살면서도 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개도 여러 마리 기르며 나만의 작은 농장을 가꿔왔던 터였다. 이제야말로 넓고 공기 좋은 자연에서 건강을 지키며 자연을 벗삼아 자유스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나만 좋다고 될 일인가. 아내야 오래 전부터 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대학생인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찬반 의견 끝에 귀농이 결정됐고 앞으로 생길 어려움은 조금씩 나누어 해결하기로 했다.
예전에 친척의 권유로 경기도 안성시 공도에 논을 사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하남마을로 가게 됐다.
처음 1년은 나 자신이나 가족 모두 힘겨웠다. 아내는 50여 년을 도시에서만 생활해 도시에 대한 향수(?)로 몹시 우울했고 아이들은 교통 불편을 호소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으나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났다.
아내와 나는 먼저 밭을 일구기로 하고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밭농사를 짓는지 어깨너머로 배우며 그럴듯하게 고추와 콩농사를 시작했다. 하늘도 우리 마음을 알았는지 풍성한 수확을 맞게 됐다. 아내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보람을 느꼈으며 나의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갔다. 그 부분은 지금도 가족들에게 고맙다.
우리집 지하수는 암반수로 그 수질이 뛰어나 물 맛이 너무 좋다. 혼자 먹기는 아까운 물이다. 농사도 잘 되고 물 맛도 좋고 평소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직접 농사지은 고추와 콩을 열심히 손질해 기막힌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어 맛있는 찌개를 끓여 주었다. 혼자 먹기 적적할 때는 이웃들과 함께 먹었고 도시에 사는 친척들이 한번씩 다녀가면 아내는 듬뿍듬뿍 장을 퍼 주었다. 그때마다 "맛이 참 좋다"며 칭찬하는 말에 장 담그는 일이 우리집의 즐거운 행사가 되고 말았다. 요즘같이 인스턴트 음식이 난무하고 외식 문화가 발달한 때 나라도 무공해 식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전통 장(醬)개발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음식은 특히 재료가 중요하다. 처음 된장을 만들 때 아내와 내가 농사를 지은 콩이 부족해서 다른 곳에서 사다가 된장을 담갔다가 낭패를 보았다. 우리나라 콩이 아닌 수입 콩을 산 것이다. 된장 몇 항아리를 망치고 재료 선별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다시 공부했고 우리 음식에는 우리나라 흙에서 난 재료를 쓰는 것이 최고구나 하는 당연한 교훈을 깨달았다.
그 쾌거로 우리는 냄새 없는 청국장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 우리 손주 녀석들도 잘 먹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난 보람을 느낀다.
고추장도 마찬가지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볕 좋을 때 말려 깨끗하게 손질하여 정성들여 쑨다. 발그레한 색을 내며 익어 가는 고추장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리곤 한다.
장 담그기는 재료를 고르고 장을 담그고 장독대를 관리하고 뭐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할 수 없는 참 까다로운 작업이다. 난 장담그기를 하면서 또 하나 내 고집을 세웠다. 장 담그는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하고 컴퓨터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사람 손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미련한 생각(?)에 지금도 그 원칙을 고수한다. 아내한테는 참 미안한 노릇이다. 이렇게 만든 고추장, 된장은 알음알음으로 주위에 주문판매도 하고 있다.
한 번은 그 많은 장독을 닦느라 아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이고 있는데 아내가 "왜요?"하며 웃길래 "그냥 예뻐서"하고 생전 처음 예쁘단 말을 하곤 겸연쩍어 웃었다. 요새는 어디서 좋은 장독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아내가 먼저 가지러 가자고 서두른다. "여보 참 고맙소!"
예전 어머니가 장 담그실 때 그 진지함을 볼 수 없는 요즘 젊은이들은 소중한 우리의 정서를 느끼지 못하는 불행(?)을 안고 사는 것 같다. 우리의 장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해 그들도 우리의 장, 우리의 음식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외국인들도 그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연구하여 세계적인 음식으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이다. 내 손자, 손녀가 먹는 장, 몸에 이로운 먹거리를 만드는데 힘을 다하고, 훌륭한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으로 나의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런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살 수 있는 지금의 내 시골생활 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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