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가(王家)의 비극적 사건을 말할 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복형인 효령세자(孝寧世子)가 10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총명했다. 3세 때 효경을 외웠고 7세 때는 동몽선습을 독파했다고 한다. 15세에 이르러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볼 때까지 그는 정치적으로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파싸움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 아버지와의 불화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사도세자의 잇단 비행과 정신병적 성향까지 두드러지면서 조정에는 드디어 세자폐위를 외치는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파워그룹이던 노론은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쪽이었고 그의 장인이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위시한 외척세력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미움이 극에 달하고 조정의 중론이 세자를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자 홍봉한마저 세손(世孫:후일의 정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세자를 포기한다. 사도세자는 27세가 되던 1762년 음력 윤5월13일 뒤주 속에 갇히고 만다.
■ 조선조 때 대권을 거머쥐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부왕의 선택이었다. 그 시절 '왕심'(王心)을 받아 세자에 책봉되느냐의 여부가 관건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무엇일까. 역시 민심(民心), 즉 여론이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한에는 여론의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힌 노무현씨의 정치적 곤경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 한때 50%를 넘는 여론 지지를 받으며 '노풍'(盧風)을 불러일으킨 그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도가 떨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애초부터 정치적으로 그를 공격했던 야당이나 보수진영이 언성을 높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의 후견세력이 되어야 할 민주당 내에서도 후보교체의 소리가 나왔다. 왕심이 달라지자 세자폐위를 주장했던 것이나, 민심이 떨어지자 후보교체를 말하는 것이나, 별다른 게 없는 것 같다. 노씨가 현대판 사도세자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신재민 논설위원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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