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쁜 정치 경제의 숨바꼭질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중요하고 직접적인 게임은 남북관계다. 30일 남북은 철도연결 등 전례 없는 광범위한 경제협력과 실천 의지를 보이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에 앞서 지난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러시아 극동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났고, 17일에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는다.이런 긍정적 움직임과 달리 미 국무부의 볼튼 차관은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을 방문,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재규정하고 핵사찰 문제 등 군사적 문제에 대한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상충되는 상황은 남북, 북일, 북러 사이에 진행되는 지역적 경제적 관계와 미국의 전세계적 군사 전략적 시각이 충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대 이라크 전쟁 명분쌓기에 열중하고 있는 미국은 자신들의 잣대로 북한을 평가할 뿐, 남북간에 전개되는 경제적 변화나 부분적인 정치적 변화에 큰 관심이 없다. 이와 반대로 강경한 미국의 입장을 의식하고 있는 북한은 남북관계의 변화, 북일관계의 진전, 북러·북중관계를 이용, 미국의 대북한 자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진전과 북일관계의 변화는 이렇게 커다란 미국과 북한의 전략적 계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 인식은 남북 경협의 발빠른 진행, 9월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 등에서 잘 읽을 수 있다. 다른 어느 시점보다 남북 경제협력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갖는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대북 인식 차이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북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미국은 상당한 유보를 갖고 있다. 이 인식 차이를 좁히는 데는 북한의 상황 인식과 전략 변화의 이해가 중요하다.
북한은 최근 경제체제 전환 의지를 밝히고 이를 대외적으로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다. 즉 북한은 협상카드가 거의 소진된 상태에서 경제정책의 변화를 통해 국내문제도 해결하고 대외적 이미지도 제고하면서 한국과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을 통해 미국의 대북한 인식 변화, 즉 '악의 축' 국가로부터의 예외 인정을 꾀하고 있다. 동시에 군사·안보문제는 최종적으로 미국을 상대하는 카드로 남겨두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은 남북 경제관계의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커다란 외교적 도전을 의미한다. 빠르게 진행되는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계획의 수행과정에서 미국이 북한을 예외로 인정할 수 있을만한 가시적인 북한의 체제변화 의지와 남북 및 북일 관계 변화 여부가 중요한 문제다.
이상적으로는 남북, 북일, 북중, 북러간의 경제 관계의 변화가 북한의 경제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와 국제사회가 북한의 변화 의지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일 것이다. 정반대로 북일관계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대북 인식에 격차가 나타나면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진행되는 경우 우리의 입지는 아주 어렵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는 북일관계 정상화의 일부 진전, 남북 경제관계의 부분적 변화, 북한 경제개혁의 부분적 진전 등으로 통일된 대북 인식이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애매한 상황은 우리에게 복잡한 외교적 과제를 안겨줄 것이다. 첫째, 남북한 경제 관계의 변화가 가져올 북한 체제 변화의 정치·군사적 의미의 파악과 대미 설득이다. 이에 따라 북일관계 변화에 따른 일본과의 대북 인식 공유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나아가 남북간 철도연결 등으로 영향을 받게 될 러시아 중국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적극적인 대미 설득에 나서야 할 것이다. 둘째, 지역적으로 북한의 경제개혁에 대처할 수 있는 협조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 경우 현행 KEDO 방식의 원용도 가능할 것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막연한 대북지원 규모의 논의에 머물러 있던 대북정책은 북한의 경제개혁의 방향과 내용에 따라 구체적 대응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 경제체제의 여러가지 변화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하고 부문별 영향평가에 근거한 전략적 계획 작성이 필요하다.
하용출/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