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코스닥에 등록한 바이오 기업 대표 K씨는 등록이후 '꾼'(작전세력)들로부터 "주가를 띄워줄 테니 보유 지분을 팔지 말고 호재가 될 만한 공시 1,2개만 발표해 달라"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았다. K씨는 그때마다 단호히 거부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당수 신규 등록 기업들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직간접으로 작전에 가담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었다. 한국 증시가 한탕주의를 좇는 '검은 손'의 장난으로 멍들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각종 주가조작 사건과 불공정거래로 가뜩이나 취약한 증시는 투자자들의 외면 속에 빈사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세계 47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의 증시 규모는 세계 15위로 상위권이지만 증시 건전성은 39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증시건전성 최하위
과거 일부 '큰손'들에 국한됐던 작전은 이제 기업가와 증권회사 직원, 투자상담사, 대학생과 주부등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증권가와 코스닥 기업에 만연된 모럴해저드로 기업가와 작전세력이 한통속이 되기도 하고, 대박의 꿈에 현혹된 일반 투자자들조차 공공연히 "좋은 거 없냐"며 작전주에 손을 대고 있다. 1999년 189건이던 금융감독원의 각종 불공정거래 조사 건수는 2000년 274건, 2001년 411건으로 늘어났으며 올들어 6월까지 174건이나 적발됐다. 불공정거래로 대표이사가 검찰에 고발되거나 구속된 코스닥 기업만 새롬기술을 포함해 17개사에 달한다.
▶갈수록 지능화 조직화
주식시장이 침체되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시세조종은 최근 더욱 지능화하고 기업 및 증권업계 내부자들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
올 4월 적발된 D사처럼 사채업자나 외국계를 가장한 '검은머리' 외국인을 대상으로 유상증자를 하거나 CB(전환사채)나 BW(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해 작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코스닥 공모·등록에서부터 M& A(인수합병)까지 풀코스로 작전을 책임지는 '패키지 작전'까지 생겨났다. 올 6월 적발된 흥창은 대주주가 부도직전 역외펀드를 통해 주식을 대량 처분하고 직원명의 계좌로 허수주문·고가매수 주문을 내 21억원의 손실을 회피하기도 했다.
이처럼 코스닥이 각종 시세조종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은 전산매매가 일반화된 데다 거래소와는 달리 시가총액이 200억원 이하인 기업이 전체의 52%를 차지하는 시장 특성 상, 몇 사람이 20억∼30억원만 있으면 작전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 최순권 조사총괄팀장은 "최근 감시·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규모 작전은 점차 감소하는 반면 점조직 형태로 첨단 금융기법을 악용한 시세조종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탕주의가 작전 양산
전문가들은 "한탕만 하면 된다"는 증권업계 종사자와 투자자들의 인식과 도덕불감증이 독버섯처럼 번지는 작전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적발된 솔빛텔레콤의 경우 작전 가담자들이 챙긴 부당이득만 325억원에 달했다. 게다가 작전을 하다가 적발돼도 대부분 벌금형으로 끝나는 가벼운 제재를 받는 점도 작전세력을 부추기고 있다. 수 백억원의 이득을 챙기고도 무혐의 처리 되거나 고작 몇 억원 수준의 벌금에 그치고, 일부만 사법처리 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가 몇 년이 지나면 또다시 복귀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제일투자신탁증권 김정래 기업분석팀장은 "무엇보다 시장참여자들이 증시의 기초는 '도덕과 신뢰'라는 점을 끊임 없이 자각하고 시장이 공정한 룰에 의해 굴러갈 수 있도록 투명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 작전참가자 고백
"천수답 같은 증시에서 돈 좀 만졌다는 사람은 작전꾼들 뿐이니 누구든 유혹에 빠질 수 밖에요."
7년동안 증권업계에 근무하면서 "3차례 작전에 가담해봤다"는 정민수(가명·37·사설 투자상담사)씨는 머니게임으로 변한 증시 현실이 개미(개인투자자)들까지 작전주에 기웃거리게 만든다고 했다.
증권사 영업맨 출신인 그는 요즘 대학 동문인 절친한 애널리스트와 짜고 코스닥 특정 종목을 정해 집단 매수로 주가를 끌어올린 뒤 인터넷 동호회를 통한 집중 매수 추천으로 개미들이 따라붙으면 순식간에 팔아치우는 '번개작전'을 하고 있다. 2000년 사채업자가 낀 첫번째 대규모 작전에서는 다른 팀이 약속된 매도 타이밍보다 일찍 팔고 튀는 바람에 2억원의 손실을 보았지만 최근 인터넷을 무대로 개미들을 이용한 두세번째 건에서는 500%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서너번을 실패해도 한번만 잘 굴리면 한탕 먹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작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게 정씨의 고백이다.
증권가 작전세력은 무엇보다 신뢰와 결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연·지연으로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S대파, Y대 상대파, D상고파가 대표적이다. '덩치'가 큰 작전에는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를 끌어들이는 것이 필수. 술집에서 거액을 찔러주면 애널은 결정적 순간에 해당 종목의 매수추천 리포트를 내놓고 펀드매니저는 자신이 관리하는 펀드에 '모르는 척' 작전주를 집어넣어 물량을 받아낸다. 당연히 해당 펀드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고 펀드매니저는 "주식시장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며 깡통 펀드를 남겨둔 채 회사를 옮기면 된다.
최근에는 증권가 펀드매니저들이 S대 출신들로 채워지면서 작전 계보들이 많이 사라지고, 애널과 펀드매니저에 대한 금융당국과 증권사들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이들이 몸을 사려 대형 작전의 물량소화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정씨는 델타정보통신 사건에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 꾼들인 '테헤란팀'이나 '도곡동팀'이 깊숙이 개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테헤란과 도곡동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지역에 오피스텔을 빌려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팀은 보통 3∼4명으로 구성되며 주로 모증권 도곡동지점을 즐겨 이용한다. 이들은 과거 증권사 출신 여직원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해 비밀을 철저히 지킨다는 서약 아래 한달에 1,000만원 안팎을 주고 실제거래를 맡긴다.
과거에는 작전이 보통 6개월 정도 걸렸지만 요즘은 기간도 짧아졌다. 작전 시작 단계에서는 주요 주주 주식소유현황과 대주주 위장소유주식여부, 핵심 개인주주의 거래 증권사등을 파악한다. 이어 대주주로부터 주식을 매각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얻어 본격적인 주식매집에 들어간다. 주가가 크게 오르내리는 속칭 '흔들기'를 통해 개인물량을 저가에 모두 걷어낸 다음 회사의 호재성 공시를 앞세워 주가 띄우기에 들어간다.
여의도 증권가 작전세력 사이에서는 지금도 2년 전 코스닥 S, H, D 기업의 주가조작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정·관계는 물론 증권사·기업체·조직폭력배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이들 종목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작전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고 한다. 각자 먹을 만큼 먹은 뒤 아무런 뒤탈 없이 '그들만의 잔치'를 끝냈지만 지금 그 물량은 애꿎은 개미들이 떠안은 채 주가는 10분의1 토막이 났다. "꾼인 나도 시장이 투명해지고 주가가 올라 정석 투자를 통해서도 수익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마지막 변명이었다.
/김호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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