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이후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와 중단을 반복해 온 북일 관계가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양국 간의 모든 현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정치적 결단을 통해 일괄 타결을 시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동안의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지지부진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과거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과 마찬가지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피해배상이라는 커다란 난제가 걸려 있다. 한일 회담이 10년 가까이 걸렸듯 과거청산 문제는 몇 차례의 협상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또 한일 국교정상화가 냉전 시대 동북아시아의 질서 회복과 안정을 꾀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로 사실상 타결을 보았듯이 북일 관계 역시 북미 관계에 종속돼 있다는 측면이 컸다.
북한이 거액의 식민지 배상금 등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한다면, 일본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문제 등 안전보장 문제를 가장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양측은 그동안 일본인 납치 의혹, 요도호 납치범 신병 인도, 북한 공작선 사건 등 그때그때 불거지는 악재에 부딪쳐 과거 청산과 안전보장이라는 본의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못하고 교섭이 결렬돼 왔다. 이같은 악재 발생으로 인한 일본 내 여론과 북미·남북 관계의 악화 등 국제정세도 북일 관계를 자주 가로막았다.
따라서 북일 정상회담은 최소한 일본인 납치의혹 등 일본측이 국교정상화의 선결과제로 보는 이같은 악재들을 정리하고 본의제 해결을 향한 큰 원칙을 제시하는 합의를 끌어내야 성공했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북일 정상회담이 과연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얼마나 풀어낼 수 있을지 점치기 어렵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인 납치의혹 등 일본측이 선결과제로 보는 현안들에서 우선 성과를 거두는 데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본의제와 관련한 일본의 양보를 고이즈미 총리가 공식적으로 표명해 주기를 바랄 것이 분명하다. 일본으로서는 선결과제들을 해결해야 국내 여론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지만, 북한으로서는 선결과제들이 사라지면 일본이 북일 대화에 소극적으로 나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우여곡절의 북일 관계사를 보면 1990년 9월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공동대표단이 방북해 김일성(金日成) 주석과 회담한 뒤 공동선언을 발표해 금방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을 나았지만, 그 뒤 휴지조각이 돼 버린 사례가 있다. 1997년 11월에도 일본 자민당·사민당·신당 사키가케 등 연립3여당의 실력자가 방북해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에 합의했지만 후속 교섭에서 실질적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 정치권에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은 일종의 '도박'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9월 17일 당일치기 방북이라는 일정으로 볼 때 그 사이에 실무당국자 간의 물밑 접촉이 이루어질 것을 고려해도 얼마나 깊이 있는 회담이 가능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와 함께 관심거리는 여전히 북한에 대해 강경 입장인 미국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9월 9∼14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미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측과 의견 조율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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