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블로크 지음·김용자 옮김 까치 발행·1만2,000원
프랑스가 낳은 20세기 역사학의 거장 마르크 블로크(1886∼1944)는 '그는 진리를 사랑했다'라는 말을 묘비에 새겨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울러 장례식장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서 4개, 2차 대전에서 1개 받은 군대 표창장을 읽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봉건사회'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굵직한 저작을 남긴 그는 군 복무의 의무가 면제된 53세의 나이에, 가족과 책상 대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았고 레지스탕스 활동 끝에 총살당했다. 그로서는 결국 이런 유언 밖에 남길 수 없지 않았을까.
'이상한 패배'는 그가 1940년 5월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 패배한 뒤 그해 6∼9월 게레-푸제르의 시골 집에서 절망, 피로와 싸우면서 쓴 2차 대전 참전 기록이다. "이 글이 언젠가는 출판될 수 있을까?"로 시작하는 책은 '증인 소개' '피정복자의 진술' '한 프랑스인의 자성'이라는 세 개의 글과 유서, 지하출판물 등을 담은 부록으로 구성돼 있다.
'증인 소개'에서 블로크는 자신을 '유대교 회당에 나가지 않는 유대인'이며 두 차례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료 담당 장교이며, 전쟁터에서의 관찰과 증언을 토대로 책을 썼음을 밝히면서 글을 열고 있다. 소르본 대학 교수로서, 전쟁 장교로서 그가 남긴 전쟁의 기록 속엔 긴박한 포연이 어른거린다. "5월 22일 플랑드르 지방에서 수송대가 비행기 폭탄 공격을 받았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기관총탄에 맞아 죽었다. 나는 얼이 빠졌고… 추하게 떨었다."
'피정복자의 진술'에서 블로크는 프랑스군의 문제들을 직시한다. 독일군의 승리는 본질적으로 지적인 승리이며 독일군은 속도 개념에 입각해 현대전을 치르는데 반해 프랑스의 지휘관들은 1940년에 1차 대전 식의 전쟁을 다시 하려 했다는 게 블로크의 비판이다. 지휘부가 소속부대의 소재를 몰라 명령이 제 시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제 위치와 지도 위에 표시한 지점은 30㎞나 차이가 났다. 복잡하고 층층시하인 명령체계, 끝도 없이 만들어지는 서류들, 그리고 독일군과 싸우기보다는 자기들끼리 경쟁하느라 바쁜 총사령부와 국방부…. "중위 때는 벗, 대위 때는 동기, 소령 때는 동료, 대령 때는 경쟁자, 장군 때는 적"이라는 말처럼 프랑스 군 내부의 불화는 심각했다.
블로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 프랑스인의 자성'에서 조국에 대한 뼈아픈 반성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저지른 무책임을 고발한다. 군수공장의 노동자는 작업대에서 게으름을 피웠고 사장들은 줄행랑을 쳤으며 상류층과 중·장년은 병역 면책의 특권을 찾으려 애썼다. 블로크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 모든 성인은 동등한 의무를 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모든 사람이 공동의 위험에 대처해야 하며, 어른과 지도층이 앞장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헤로도토스가 남긴 "전쟁의 큰 모독은 아버지가 아들을 무덤에 묻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연된 병역 기피가 프랑스의 집단적 허약함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탄식한다. 앞서서 조국을 지켜야 할 이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고 "조국의 위기 앞에서 가차없는 영웅주의가 부족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운명이 프랑스인에게 달려 있지 않은 참혹한 상황"이 되었고 "우리는 모욕당하는 관람객"이 되었노라고 그는 비탄에 잠겨 말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아직도 흘릴 피가 있기를 바란다…. 희생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이 책은 역사의 현장에 뛰어든 한 지식인의 육성을 통해 '지식인이란 무엇 하는 존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포탄과 총성, 죽음과 삶의 경계 사이에서 던지는 통찰과 역사적 안목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블로크는 1908년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역사 교사로 일하며 중세사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1920년 '국왕과 농노, 카페 가의 역사의 한 장'으로 국가박사학위를 받고 1936년까지 스트라스부르 대학,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의 중세사 교수로 재직했다.
블로크는 1940년 10월 괴뢰 정권인 비시 정권에 의해 관직에서 밀려났고, 이후 리옹을 근거지로 레지스탕스로 활동을 하다 나치에 붙잡혀 리옹 근처의 들판에서 처형됐다. 쓰러지면서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이 책은 나치 치하에서 가까스로 보존되다가 1946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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