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제3공화국 탄생과 함께 나는 6대 국회에 전국구로 진출했다. 김재순(金在淳) 의원과 함께 여당인 공화당의 원내 부총무를 맡았는데 당시 원내총무는 육사8기 출신인 김동환(金東煥) 의원이었다. 야당 원내총무는 김영삼(金泳三) 의원이었고, 유치송(柳致松) 김은하(金殷夏) 의원이 야당 원내 부총무를 맡았다.제3공화국 출범 후 맞은 최초의 위기는 이듬해의 한일회담이었다. 양국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자 야당과 각계 인사들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를 결성해 반대 투쟁에 나섰다.
바로 그때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당시 일본 외상이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사이에 맺어진 '김-오히라 메모'가 언론에 보도되자 반대 투쟁은 더욱 격렬해 졌다. 1962년 11월12일 백지 두 장에 만년필 글씨로 작성된 메모의 내용은 무상 공여 3억달러 유상 공여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등이었다.
한일회담에 대한 나의 소신은 확고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한국은 미국과 일본과의 협조 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따라서 일본이 한국 정부를 합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기본 조약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의 자본을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사회 분위기는 민족 감정이 우선이었다. 정부 여당과 학생 및 야당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다.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을 할 때였다. 밖에 나가 보니 유진오(兪鎭午) 고려대 총장이 고려대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여당 국회의원들은 험악한 분위기에 눌려 다들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나는 연세대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후배들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36년간 수탈 당한 걸 생각하면 36억 달러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금액이 아니라 양국이 합법 정부로서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기본 조약을 맺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 자본이 절대 부족해 외국으로부터 비싼 차관을 도입하는 마당에 청구권 자금이라도 활용하는 게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여러분도 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학교 선배가 나왔다고 해서 얘기를 경청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자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설득해도 쉽게 해산하지 않았다.
학생 데모는 끝없이 계속됐다. 결국 5월11일 최두선(崔斗善) 내각이 총사퇴하고 정일권(丁一權) 내각이 들어섰다. 당시 언론은 정일권 내각을 가리켜 '돌격 내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일권 내각도 전국적인 반대시위를 막아내기에는 힘이 부쳤다.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렸다. 여기에서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는 반 외세, 반 매판, 반 봉건에 있으며 참된 민족·민주의 길을 가기 위한 도정이었다"는 내용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한일 굴욕회담 반대 운동이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것이다.
6월3일 마침내 6·3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10만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쳤다. 서울의 시위대는 청와대 앞까지 진출해 청와대를 경비하던 공수부대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학생들이 청와대를 포위하고 있던 밤 9시를 넘은 시각에 버거 주한 미대사와 하우즈 주한미군 사령관은 헬리콥터로 청와대로 날아 가 박 대통령과 긴급회담을 했다. 정권 유지에 위협을 느낀 박 대통령은 결국 이날 밤 9시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당시 계엄군은 포고령 1,2호를 발동해 시위 금지, 언론 출판의 사전 검열, 각급 학교의 무기 휴교, 영장 없는 압수 수색 구금 조치를 내렸다. 민기식(閔耭植)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았고 김재규(金載圭) 육군 소장이 이끄는 사단이 서울에 계엄군으로 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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