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대통령 선거의 최대 쟁점은 사상 논쟁이었다. 민정당 윤보선(尹潽善) 후보는 선거 초반부터 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박정희 후보는 여순 반란사건 관련자입니다. 박 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국민들이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적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민족적 이념에 바탕한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라며 응수했다. .그러나 어떻든 사상 논쟁은 박 후보에게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동아일보는 박 후보가 여순반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기사를 실은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치열했던 선거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투표 이틀 전이다. 유세를 마치고 저녁 무렵 박 후보의 장충동 공관에 들어 섰더니 공기가 싸늘했다. 거실에는 박 후보와 김성열(金聖悅) 동아일보 정치부장,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 등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의 얼굴이 모두 잔뜩 굳어 있었다.
"아니 그래 내가 빨갱이란 말이오!" 박 후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김 부장에게 날아 갔다. "동아일보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거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하는 삐라를 만들어 뿌리고 말이야."
박 후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투표 하루 전날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인터뷰를 함께 싣기 위해 인터뷰를 하러 왔던 김성열 부장은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곧바로 2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의장님, 참으시죠. 다 이긴 선거인데 하루만 더 참으면 됩니다." 박 후보의 노기를 풀어 보려 나름대로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후락 공보실장이 뒤늦게 2층으로 올라 오자 박 후보는 "당신은 어떻게 저런 친구를 데려 왔어"라며 버럭 화를 냈다.
끝내 우리는 박 의장을 설득하지 못했다. 박 의장이 당시에 불거진 사상 논쟁에 얼마나 심한 불쾌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리가 없었다. 나와 이 실장은 김성열 부장과 상의해 부랴부랴 인터뷰를 꾸며서 만들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0월15일 투표에서 박 후보는 15만여표 차이로 윤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5·16 세력이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 입고 정권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윤 후보는 패배의 아쉬움을 이렇게 달랬다. "득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다."
대선이 끝나고 곧 있을 6대 총선 준비에 들어 간 공화당은 내게 고향인 대구 중구 출마를 권유했다. 나는 박 대통령 당선자와 직접 내 문제를 의논했다. 박 당선자는 "나와 함께 청와대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나?"고 물었다. 나는 "성격상 비서실보다는 국회에서 돕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고 원내 진출을 희망했다.
그러자 박 당선자는 이를 받아들였고 내가 지역구 출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고 하자 전국구를 권했다. 당시 내 전국구 순위는 17번이었다. 대선 승리의 기세를 몰아 간 공화당은 11월27일 6대 총선에서 압승했다. 지역구 86석에 24석의 전국구를 얻었다. 나도 마침내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그 때 내 나이 서른 하나였다.
이 때부터 3선 개헌 전까지 박 대통령은 나를 자주 불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솔직하게 여론을 전했다. 후일 정치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은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대선 2개월 뒤인 1963년 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은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더불어 6대 국회도 개원했다. 동아일보 사장이던 최두선(崔斗善)씨가 국무총리가 됐고 이효상(李孝祥) 의원이 국회의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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