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형사가 된 송강호, 화성연쇄살인사건. 이 세 가지만으로 '살인의 추억'(내년 봄 개봉)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1986년부터 5년 동안 작은 소도시에서 무려 10명의 여자가 끔찍하게 강간 살해되고, 미궁에 빠져버린 사건.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송강호 이미지까지 겹쳐 더욱 으시시하다. 영화 제목 역시 직설적으로 '살인'을 말하고 있다.그런데 한편으로 자꾸 웃음이 슬슬 배어 나온다. 봉준호(33) 감독 때문이다. 데뷔작인 그 놈의 '플란다스의 개'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 감독이 보인 엉뚱하고 기발한 일상 묘사와 상상력, 그리고 유머란. 외조부가 바로 '천변풍경'의 월북 소설가 박태원이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 사실을 안 것이 대학(연세대 사회학과) 때였지만 피는 속일 수 없다.
2000년에 가장 불운한 영화를 꼽으라면? '플란다스의 개'다. 흥행 참패(전국 10만명)는 고사하고 독창성조차 전혀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럼 그 해 나온 가장 행복한 영화는? 역시 '플란다스의 개'. 지금까지 무려 30여개 세계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독일 일본 등에 수출됐고, 홍콩에서는 박스오피스 5위를 차지했다. 처음에 무시하던 국내에서도 평가가 달라졌다. 만시지탄. 이 모든 것은 1년 뒤의 경사였다. 어리둥절하다는 봉 감독. "이상한 내러티브, 웃음 잔혹 서글픔이 뒤섞인 불편한 감정, 뜬금없이 끼어드는 만화적 상상력. 낯설고 괴상했을 것이다.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영화제에서는 즐기지만, 대중적인 호소력은 부족한."
그렇다고 천성을 버릴까. 아무리 연쇄살인 이야기라도 '봉준호식' 상상력과 충돌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27일 전주에서 첫 촬영에 들어간 그를 만나 들어보았다.
―이 영화를 하게 된 동기는.
"범죄추리소설 광이었다. 감독을 꿈꾸면서부터는 당연히 하고 싶었다. 어릴 때 (대구) 변두리에 살면서 얻어진 이미지 때문인지 도시풍의 폼잡는 느와르보다는 농촌 범죄영화가 좋다. '서정적 풍경과 엽기적인 시체'란 안 어울리는 것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희로애락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공포를 보여주고 싶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야말로 적격이다. 당시 시대적 한계까지 묘하게 얽혀 있다. 코엔 감독의 '파고'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장르를 규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농촌스릴러? 전원일기 스릴러? 그러다 '연쇄살인 실화극'으로 정했다."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가 원작인데.
"형사 중심의 인물 구도나 FM 라디오를 이용한 수사 등은 희곡에서 따왔다. 나머지는 6개월 넘게 당시 사건기록을 뒤지고 기자, 형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 사건, 그것도 끔찍한 살인을 다루는 영화라 플란다스식 상상력이 스며들 여지가 없지 않은가.
"각론에 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큐멘터리도 편집 음악으로 상상력이 가능한데 하물며 픽션을 가미한 드라마에서야. 사건의 여백은 나의 공간이다."
―미궁의 사건인 만큼 결말도 싶지 않을 텐데.
"처음 시대적 관점에서 보려 했다. 물론 당시 이 사건에 전력을 기울지 못한 시대상황도 있었다. 때문에 형사들에게 더욱 애착이 갔다. 그들의 분노와 애환을 통해 살인이 얼마나 끔찍하고 분노할 일인가를 관객들이 공감하는 인간드라마로 끌고 가려 한다. 대반전도, 추리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실제 그들도 그랬고 시나리오를 쓰며 나도 그런 심정이었으니까. "
―왜 영화를 하고,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가.
"인간에 대한 표현의 욕구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많이 보고 그리기도 했다(아버지가 미대 교수여서 영향을 받은 듯). 내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지면서도 핵심 정서는 보편성을 가지는 그런 영화. 팀 버튼의 '가위손'이나 스파이크 존스의 '존 말코비치 되기'를 봐라. 엉뚱한 상상력으로 다가설 수 없는 외로움, 욕구에 대한 뼈아픈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는 내 취향의 나열에 그쳐 그 울림이 약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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