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년 9월 11일 워싱턴에서 쿠웨이트 공보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잔해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중압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어 그 파멸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내가 속한 세계의 아랍인이라는 사실이 다가왔다.나는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사라지기 3주 전 가족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사진을 찍고 일곱 살짜리 아들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았다. 3주 후 소수의 무슬림이 훨씬 많은 수(60∼70명)의 무슬림을 살해했다.
나는 얼떨떨해졌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18세 때인 1971년 학사 학위를 받으러 쿠웨이트에서 미국으로 왔다. 미국인들은 새로 온 사람, 방문객, 외국인들을 특유의 매력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개방의 정신이었다.
아메리카에서는 누구도 외국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93년 2월 세계무역센터 건물 폭파사건의 배후인물인 이집트 근본주의자 오마르 압델 라만까지도 그랬다. 미국인들은 방문객에게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는 법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는 모두가 이런저런 식으로 아메리칸이다.
아메리카 번영의 상당 부분은 이처럼 아메리카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일 수 있는 능력에 기인한다. 미국의 힘은 그러한 균형에 있으며 9·11 테러범들이 파괴하려 했던 것도 바로 그 균형이다.
그런 미국이 요즘 점점 덜 미국적이 돼 가고 있다. 덜 개방적이고 덜 수용적이 돼 가고 있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아랍 젊은이들은 나와 같은 기회를 갖지 못할 것 같다. 되풀이되는 보안검사 등으로 미국을 찾거나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랍인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분간 오사마 빈 라덴은 승리한 셈이다. 관계를 악화시키고 두 문화 사이에 진정으로 증오를 심은 것이다.
테러가 난 지 하루 뒤 사무실에 나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평소보다 더 많이 쳐다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시선에 나는 미소로 응답하며 스스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샤피크, 너 밤새 한결 멋있어졌나 보다."
70년대에 내가 겪은 아메리카에서 나는 인간은 이데올로기가 어떻든지간에 용납될 수 있고 타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좌파였고 베트남전과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에 관한 반미 슬로건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 나는 미국 교수들의 관용에 놀랐다.
그들은 골수 공화당원이든, 근본주의 기독교도이든 간에 마음은 한결같이 공정했다. 그런 점이 놀라웠다. 80년대 대학원 시절 시온주의자였던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관용은 사람의 심성을 차분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서로간에 이해가 오고 갈 수 있게 해 준다. 관용은 관용을 낳는 법이다. 쿠웨이트대학 정치학과 교수로서 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을 지닌 제자들에게 은사들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9·11은 아랍 세계의 모든 문제, 그 모든 불일치와 모순과 위기의 악순환 등을 논란의 중심에 올려 놓았다. 우리들 중 일부는 빈 라덴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증오를 만들어내고 메시아주의적 불관용을 설파하고…. 미국은 우리쪽에 부당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되풀이되는 좌절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9·11은 차츰 아랍인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9·11은 어떤 동력(動力)을 만들어냈다. 이는 우리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용, 정의, 개방성과 같은 이상이 우리를 인도함으로써 작금에 우리가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증오와 복수의 위태로운 난무로부터 멀어지기를 희망할 수 있다.
샤피크 가브라/ 쿠웨이트대 전략연구소장 정치학과 교수
/NYT 신디케이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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