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동양의 신화] (17)폭군 걸(桀)과 성군 탕(湯)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동양의 신화] (17)폭군 걸(桀)과 성군 탕(湯)

입력
2002.08.28 00:00
0 0

영웅은 신화적 속성을 지녔으면서도 반쯤은 역사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으로는 국가나 도시의 건설자일 때가 많다. 가령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웅 테세우스는 아테네, 카드모스는 테베의 건설과 관련이 있다. 중국 신화에서도 이러한 신화·역사적 존재들은 왕조를 세운 영웅들이다.홍수를 막아 백성들의 재난을 없앴던 우(禹)는 그 공로로 순(舜) 임금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우부터는 왕위를 요순 시대처럼 덕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왕조 시대가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하(夏) 왕조이다. 하 왕조는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신화의 세계에서는 확실히 존재했던 나라이다. 하 왕조를 신화적으로 존재케 한 유명한 이야기는 폭군 걸(桀)과 그를 내쫓 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탕(湯)에 관한 신화이다.

성군 우가 세운 하 나라는 자손들에 의해 계승되어 수백년을 안정되게 지속했다. 그런데 폭군 걸이 출현하여 마침내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걸은 거구에다가 힘도 세고 용맹한 기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폭군들의 특징은 본래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은(殷)의 주왕(紂王)도 씩씩한 대장부였으며, 백제의 의자왕도 한 때는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행실도 좋은데다가 단숨에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을 만큼 과감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그 기백을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에 발휘함으로써 폭군이 되고 만다.

걸은 우선 요대(瑤臺)라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그 안을 천하의 온갖 진기한 물건과 미녀들로 채운 다음 향락에 탐닉했다. 궁 안에는 큰 연못을 파고 술로 채웠다. 걸은 연못 위를 배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이상한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즉 북을 한번 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연못가에 엎드려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취해서 빠져죽는 사람이 생기면 걸은 그 광경을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한다. 그는 또 갑자기 시장 한 가운데에다 호랑이를 풀어놓아 사람들이 놀라 도망가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겼다 한다. 폭군에게는 언제나 그의 악행을 부추기는 간신과 비첩(妃妾)이 있기 마련인데 나라 망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담당하는 것은 비첩이다. 걸에게는 왕비 말희(女末喜)가 있었다. 걸은 모든 향락에 말희를 동반해서 즐겼지만 말희도 기벽이 있는 여자였다. 말희는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한다. 걸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국고에 있는 그 비싼 비단을 꺼내어 그녀 앞에서 하나 하나 찢어 보였다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두 남녀였다.

걸은 천자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해서 자신을 태양에 비겼는데 당시 걸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해를 보며 이렇게 저주했다 한다. "이 놈의 해야. 언제 없어질래? 너랑 나랑 같이 죽어버리자꾸나"라고.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이처럼 극도에 달하고 민심이 걸과 하 나라를 떠나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당시 인자한 정치로 민심을 얻고 있던 제후국 은 나라의 왕 탕(湯)에게로 귀순하였다.

그러면 탕은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구척(九尺) 장신(長身)에 용모가 뛰어나 한눈에도 비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음도 인자했다. 한번은 들에 나갔다가 한 사내가 새그물을 치고 기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든 땅에서 솟아오든 사방에서 오는 것들, 모두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탕은 이 소리를 듣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아니, 다 잡아 죽이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 일은 걸이나 하는 짓이지." 그리고는 그물의 세 쪽 면을 풀어주고 한 쪽 면으로만 잡게 하였다. 이처럼 동물에까지 자비심이 많았으니 백성들에게는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은 걸이 폭정을 하는 사이에 민심을 얻어 은 나라의 세력을 점차 키워 나갔다. 그러나 걸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조문했다가 걸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뇌물을 써서 감옥에서 석방된 후 그는 더욱 국력을 길러 하 나라를 타도할 결심을 굳혔다. 마침내 이윤(伊尹)과 비창(費昌) 등 걸의 유능한 신하들이 잇달아 귀순하고, 걸이 변방 소국인 민산(岷山)에서 바친 미녀들에게 빠져 왕비 말희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등 왕실에서도 내분이 생기자, 탕은 하 나라를 정벌할 군사를 일으켰다. 탕의 진격에 당황한 걸은 장수를 보내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진 하의 군대는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은의 군대가 도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좋은 징조가 나타났다. 천제가 탕에게 불의 신 축융(祝融)을 보내 하 나라는 이제 덕이 다했으니 탕이 이기도록 도와 주겠다는 계시를 한 것이다. 이윽고 축융 신에 의해 성의 한 모퉁이에서 불이 일어났다. 탕은 이 틈을 타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걸은 왕비 말희 및 애첩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남소(南巢)라는 먼 곳에까지 도망가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다.

걸을 내쫓고 탕은 천자의 자리에 올라 은 왕조를 열었다. 이제 백성들은 성군의 다스림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듯했다. 그런데 이 무슨 변괴인가? 가뭄이 칠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것이었다. 천하는 다시 어려움 속에 빠졌다. 탕이 점을 쳐보게 하였더니 사람을 희생으로 바쳐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었던 탕은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제사를 드리는 날 탕은 백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신성한 제단이 있는 뽕나무 숲 상림(桑林)으로 갔다. 탕은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 몸을 정결히 하고 땔 나무 위에 앉았다. 막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갑자기 큰 비가 쏟아지지 않는가! 탕의 정성에 감동한 천제가 단비를 내려 칠년 가뭄을 종식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탕은 건국 초기의 난관을 극복하고 은 왕조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폭군 걸과 성군 탕, 이 두 인물은 극명히 대조되는 한 쌍으로 망국과 건국의 신화를 구성한다. 요 순 우 신화에서처럼 덕 있는 사람에게 천하를 양보하는 이야기 패턴을 선양(禪讓) 유형이라 한다면, 이처럼 폭군이 덕을 상실해서 다른 덕 있는 사람이 내쫓고 왕이 되는 경우는 방벌(放伐)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방벌은 시대가 이제는 요순 시절 같은 태평성대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상황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탕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복 국가가 출현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폭군 걸 이야기는 찬탈과 정복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설화적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걸에게는 그가 폭군이 될 몇 가지 자질(?)이 부여되어 있다. 요사스러운 애첩과 참소를 일삼는 간신, 잔인하고 향락적인 성격 등이 그것인데 이 자질들은 정형화되어 이후 망국의 군주를 설명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폭군 걸 이야기는 정치적 승리자가 꾸며낸 이야기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탕의 건국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도 지극히 정형화되어 있다. 인자한 천성, 백성을 위한 헌신, 폭군에 의한 수난 등의 이야기 성분은 이후 대부분의 건국 영웅 전설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벽하게 꾸며진 성군 이야기의 이면에 감추어진 고대 국가의 폭력적인 현실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탕의 헌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적으로 탕은 살해된 것이다. 일찍이 프레이저가 증언했듯이 고대의 왕들은 재난이 닥칠 경우 제의적으로 희생되었다. 왕은 곧 우주의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에 재난이 생길 경우 이는 왕의 기운이 쇠퇴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때 노쇠한 왕을 빨리 제거하고 젊고 신선한 기운을 지닌 인물로 교체해야 나라의 재난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부여(夫餘)에서도 흉년이 들면 왕을 죽였다는 역사서의 기록이 있다. 같은 맥락이다. 탕이 세운 은과 부여는 같은 동이계 종족의 나라들이다. 부여는 은 나라 달력을 쓰고 말 발굽이 갈라지는 것으로 점을 치는 등(은에서는 거북의 등껍질이 갈라지는 것으로 점을 쳤다) 은의 풍속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부여에서 왕을 죽였다는 역사서의 기록은 성군 탕이 살해되었다는 우리의 추측을 거들어주는 유력한 증거인 셈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주지육림(酒池肉林)

폭군의 향락적인 생활을 묘사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이 말은 하(夏)의 걸왕(桀王)과 은(殷)의 주왕(紂王), 이 유명한 폭군 둘의 생활에서 비롯하였다. 걸왕은 궁중에 술로 채운 큰 연못을 만들었고 주왕은 주지와 아울러 고기가 매달린 나무 숲 곧 육림을 조성하여 온갖 향락을 다하였다. 일설에는 주왕의 행위가 일종의 오르기(Orgy)를 수반하는 은 민족 고유의 제의적 행사였는데(은은 샤머니즘의 국가였다) 후일 주(周) 민족이 은을 정복한 후 이를 단순한 향락으로 폄하시켰다고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