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8월 공화당에 입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서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 정국에 접어 들었다. 이미 야당인 민정당(民政黨)에서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民主黨)은 허정(許政)씨를 대통령 후보로 내정한 상태였다.나는 두 달여 남은 대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치부 기자로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게 더 나을까 나름대로 이것 저것을 짚어 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박정희 후보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박 후보는 민족 의식이 투철하고 국가 발전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농촌과 서민의 고단한 삶도 어느 후보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됐다. 자유당 독재의 폐해를 생생하게 체험했고 민주당 내의 뿌리깊은 신·구파 갈등을 가까이서 지켜 보면서 기존 정치인들에게 크게 실망한 것도 내 마음이 박 후보 쪽으로 기운 요인이었다.
나는 곰곰이 자신의 미래도 따져 봤다. 정치에 대한 꿈은 여전히 식지 않은 채 내 가슴 한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특정인에게 마음이 끌려 있는 상태였다. 기자로서 가장 중요한 객관성과 균형 감각을 잃은 셈이었다. 스스로 물어 보아도 더 이상 기자로서의 자격이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기자 생활을 한다면 수많은 언론인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 해 추석날 밤이었다.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나는 아내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나의 미래를 의논했다. 그리고 둘이서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 기자 생활을 끝내자. 어차피 정치를 하고자 한 만큼 이번 기회에 정치를 시작하자."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나는 다음날 곧바로 박 의장을 찾아 갔다. "박 의장님의 민족·자주 의식과 가난에서 벗어나 자립경제를 이룩하겠다는 신념에 공감해 공화당에 입당하기로 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나의 말에 박 의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입당에 따르는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왜 공화당에 입당하게 됐는지 또 왜 박 후보를 지지하게 됐는지 소신을 밝힐 기회를 주십시오."
박 의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꼭 잡았다. "정말 고맙소." 박 의장은 그 자리에서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선거 유세반에 넣을 것을 지시했다. 내 정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날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간부들은 나를 말렸지만 내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공화당 공식 입당 수속을 밟은 후 나는 곧바로 선거 유세반에 투입됐다. 이후 나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박정희 후보 이후락 공보실장과 함께 전국을 누볐다.
내 첫 선거 유세는 고향인 대구에서 있었다. 응원단장 경험도 있고 해서 대중 연설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수성천변에 모인 엄청난 인파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연단에 오르니 저절로 말이 술술 나왔다. 목청을 높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는 짜릿한 흥분을 안겨 주었다.
"바로 여기 앞에 앉아있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돼야 합니다. 이제 서민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귀족들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박 의장은 "정말 잘했소"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박 의장은 수고했다며 담배를 한 대 권했는데 나는 기자시절 때처럼 무심코 이를 받아 피웠다. 나중에 이 일 때문에 아버지에게 혼쭐났다. "어떻게 국가 원수와 함께 맞담배질을 할 수 있느냐"는 꾸지람이었다.
당시 박 후보의 유세는 가는 곳 마다 대성공이었다. 어렴풋하게 대선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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